1월 2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한국 교회를 위하여
한국교회에 성령의 새 바람을 보내셔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하시고 회복을 넘어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분열된 한국교회의 교만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오직 복음 안에 하나 되어 온전히 연합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소서.
한국교회를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어두운 세상에 영적 대안을 제시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6:5-7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우리는 역사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복음이 한 개인이나 가정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동시에 사회나 국가까지도 변화시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구원받은 개인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고, 가정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구체적인 적용을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관계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부부 관계나 자녀와 부모 관계는 우리가 흔히 보는 관계요 익숙한 관계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생의 결정적인 해답은 이 관계 속에 다 내포되어 있음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이 세상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엡6:5-8개인 구원, 가족 구원, 사회 구원의 상관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야구 게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야구 경기장을 보면 홈 베이스가 있습니다. 거기에 타자가 있고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공을 치려고 준비를 합니다. 이 타자는 세 개의 베이스를 밟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1루입니다. 1루를 건너서 2루로, 2루에서 3루를 거쳐 홈으로 들어오게 되면 1점을 얻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그림으로 바꾸어 봅시다. 내가 복음의 볼을 치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그 볼을 영원히 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 칠 기회를 갖습니다. 볼 넷을 고르면 그냥 1루까지 가게 되고, 세 번 스트라이크를 당하면 아웃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볼 넷으로 가든, 안타를 치든, 홈런을 치든 누구든지 1루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세상에는 홈런을 치는 사람도 잇고, 안타를 치는 사람도 있고, 운이 좋아 투수의 실수로 볼 넷으로 진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먼저 1루를 개인의 구원으로 생각해 봅시다. 2루는 가정 구원, 3루는 사회 구원으로 생각해 봅시다. 1점을 따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 구원이라는 1루를 반드시 밟아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다음 2루, 즉 가정 구원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으로 3루로 넘어가 사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급한 사람들은 1루나 2루까지 거쳐 갈 시간이 없으니까 한 번 쳐서 3루만 갔다 오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회 구원만 부르짖습니다. 개인 구원이나 가정 구원을 통하지 않고 사회 구원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개인 구원과 가정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가정 하에 사회 구원을 다루고 계십니다.
성경은 언제나 방법보다는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행동보다는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정이든 사회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헌법이나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중요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남편 입장에서만 아내를 보면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자기중심적인 잘못된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 입장에서만 남편을 보면, 남편이 섭섭하고 원망스러워 바가지를 긁고 싶은 생각이 자꾸 납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분리된 개념이나 이중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동시적인 개념으로 볼 때,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를 생각하게 되고, 아내는 남편 입장에서 남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한 몸을 이루게 되면 거기서 사랑과 이해, 관용과 용서가 싹트게 됩니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미운 사람이 할 때는 굉장히 밉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면 관용으로 이해합니다. 그 관계 자체에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잘못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그릇 하나 깼다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의 감정이 그릇 깨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것 뿐입니다.
구조 보다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민주주의냐 하는 구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회 구원을 아주 단순하고 쉬운 개념으로 설명을 합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동시적인 관계 개념은 ‘내가 주인을 섬겨야 하는 종의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주인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의 이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주인이고 너는 종이다’ ‘나는 고용인이고 너는 피고용인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기독교적인 사회도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주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종이다’라는 동시적인 관계 개념을 이해할 때 사랑과 관용과 이해와 용서의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을 때, 먼저 바울 당시의 종의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국민의 대다수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바클레이의 조사에 의하면 그 당시 종의 수는 6천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6백 만이 아닙니다. 6천 만이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막노동은 물론 가정부나 일꾼도 노예였고 노동자도 노예였으며, 재미있는 것은 의사도 노예였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교사나 교수도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제기하거나 반항할 수도 없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말하는 짐승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노예에게는 인격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예는 동물과 똑같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때려도 괜찮고 감금하거나 죽여도 양심에 전혀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이런 노예 제도에 대하여 저항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고전7;20-21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신분 자체의 변화나 혁명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신분이나 제도를 바꾸려는 혁명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는 섬김의 개념은 있어도 투쟁의 개념은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개념은 존재해도 비판과 고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회학적인 훈련과 세상적 사고에 물든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고발하고 비판하는 정신이 만연해졌습니다. 민주주의와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는 혁명 세력으로 바꾸려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선언문을 만들고 데모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선언문을 만들고 데모를 하여서 역사가 바꾸어진 일도 없으며 그런 방법으로 기독교가 행동을 해온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 대해 누차 말씀하셨지만, 가난한 자 때문에 데모를 하거나 사회 운동을 일으키신 적은 없습니다. 그들을 돕는 것이지 군중을 모아 행동화시켜 투쟁하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과 섬김, 용서와 인내와 관용일 뿐입니다. 어떤 고발과 비판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기다림뿐입니다. 그 이상의 방법을 성경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데모하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살아 조용히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지 남을 선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분노, 집단적 폭력이 힘을 더 믿는 것입니다. 노조 운동, 민권 운동, 학생 운동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며 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서 교회 운동으로 교회의 사역으로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현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조용히 구제하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바울 당시에 불합리한 노예제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종들에게 한 권면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바울은 종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제안합니다.
2026년 1월 23일 오전 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