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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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환경과 생명을 위하여

1.

온 인류가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질서대로 환경을 다스리게 하소서

2.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낙태와 아동 학대 등 생명 경시 풍조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3.

환경과 생명을 위해 일하는 관계자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효율적인 정책이 세워지게 하시고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1

예수님은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를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열매 : 믿음, 소망,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충성, 자비 온유 절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더 큰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실 수 있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능, 우리의 어리석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학력이 부족했던 무디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 중 학력, 가문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여의도 순복음 교회 정문식 안수집사의 간증 책인 ‘다섯평 창고의 기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90년 3월, 스물여덟살 청년은 5평 지하창고에 공장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상호는 ‘이레전자’. 가진 것이라고는 현금 50만원이 전부였고, 백열등 아래 전선을 가공하던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좁고 캄캄한 지하공장은 10여년이 지나면서 2,500평 규모에 연매출 700억원의 대표적 벤처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다섯 평 창고의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2,000억의 매출을 올리면서 산업자원부가 주관하는 벤처기업 대상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레전자의 정문식 사장입니다. ‘다섯 평 창고의 기적’ 이란 저서에서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셨다고 정 사장은 회상합니다. “중학교 때 시골에서 올라와 옥탑방에서 힘들게 살 때입니다. 잠들기 전에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신앙훈련을 받은 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결혼 후에 공장에 다니면서 주일성수를 할 수 없게 되자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하였습니다. 다섯 평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주일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15년째 교회학교 교사를 맡아 봉사하는데 외국에 출장을 갔다가도 학생들을 위해 중도에 귀국할 정도로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옥탑방에서 힘들게 살던 자리에서 이레전자의 CEO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5:19-26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열매가 없습니다. 마귀를 따라가는 사람이 믿음이 있나요, 소망이 있나요, 사랑이 있나요? 마귀를 따라가면 육체의 일만 있습니다.

열매 없는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책망해야 합니다. 캄캄한 데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밤 길에 걸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어둠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 가지 말고,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지시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캐나다 나이가라 폭포 상류에 남녀가 뱃놀이 하고 있었습니다. 술을 마셨고 잠이 들었습니다. 배가 천천히 갔으나 폭포가 가까워질수록 급류가 됩니다. 밖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배가 폭포를 향하여 흘러가는 줄 알기에 고함쳤지만, 배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몰라요. 잠을 깼을 땐 무섭게 내려가 죽었습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다 자고 있으면 불난 줄 몰라요. 밖에 깨어 있는 사람이 알기에 소리 지를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열매 없는 캄캄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을 책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말라.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나 같이 어둠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가 공부하지 않으면 책망합니다, 그 길을 걸어와서 알기에 자식보고 훈계하고 책망합니다. 알기 때문에 책망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자식들끼리는 책망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참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빛의 열매를 맺고 삽니다. 그리하여 빛의 열매 없이 사는 사람이 장차 받을 고난을 알기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질책하거나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반대로 질책받고 책망받는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말과 태도는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의 인격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질책’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고, ‘책망’은 70번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꾸짖고 나무라는 것이 잘못을 드러내서 처벌하는 것보다 회복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책은 꾸짖고(叱) 꾸짖는(責) 것이지만 책망은 꾸짖되(責) 바라는(望)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책망으로 번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야카흐(יָכַח)인데 그 기본 뜻은 ‘드러내다’, ‘밝히다’, ‘바로잡다’, ‘설득하다’입니다. 이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하는 말이 아니라,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어 스스로 깨닫게 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구절에 같은 히브리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야카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사1:18) 여기서 하나님은 호통치듯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함께 따져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책망은 관계를 끊는 언어가 아니라 관계를 전제로 한 대화의 언어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많이 책망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엘렝코(ἐλέγχω)입니다. 이 단어는 ‘죄를 드러내어 회개로 이끌다’, ‘양심을 찌르다’는 원뜻을 지닙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요16:8) 성령의 책망은 파괴가 아니라 각성입니다. 침묵 속에 묻혀있던 죄를 끄집어내되, 그 목적이 정죄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질책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엄격히 묻는 행위입니다. 공적 영역, 위계가 분명한 관계, 규율과 질서가 중요한 상황에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질책이 쉽게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언어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월급 값은 하는 거냐”라는 말은 행동을 지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반면 성경적 의미의 책망은 언제나 질문을 포함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가? 예수님도 책망하셨습니다. 매우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책망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습니다. 행동과 태도는 꾸짖되, 회개의 문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공개적 수치를 주는 방식은 극도로 절제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8:11)

책망하는 사람은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이 말이 저 사람을 바꾸기 위함인가, 아니면 내 분노를 풀거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함인가?” 바울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갈6:1) 책망받는 사람 역시 태도가 중요합니다. 방어부터 하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삼하 12:13)

성경은 질책하되 상대의 인격을 무너뜨리지 않고 책망하되 관계를 끊지 않으며, 진리를 말하되 사랑을 잃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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