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우리 가정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예배와 기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의 모든 관계가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소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바르게 양육하는 성경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되게 하소서.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속히 주님께 돌아와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혜가 있게 하소서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44:18-3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형들의 사랑입니다. 요셉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형들은 자신도 모르는 낭패에 빠지고 맙니다. 형들이 잘못해서 빠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친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곡식자루를 열어보니까 거기 돈이 있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는 ‘이게 아닌데, 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을 당하면 보통 ‘환장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은 누명을 쓰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이 통하지 않습니다. 음모로 가득 찬 세상 아닙니까? 요셉의 형들이 이 그물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짐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절박한 환경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광야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굶어죽은 일이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환경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죄, 왜곡된 가치관, 잘못된 생각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가난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빠져나갈 능력이 있어도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당했는데 벗어날 힘도 없고 변명할 방법도 없습니다. 이럴 때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이 때 이 사람이 누구를 바라볼까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겸손하거나 마음이 넓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속에 분노가 있고 내 의가 있고 내 생각을 잠재웠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광야 40년을 지내고 나서야 속마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형들의 마음 속에는 이제 포기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형들의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 지고 정직해 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20년 전 형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20년 전과 다르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성격은 신앙의 틀입니다. 성격이 변하지 않고는 무엇을 갖다 집어넣어도 안됩니다. 틀을 바꿔야 합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집어넣어도 내 틀이 바뀌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갑니다.
이 형들은 기막힌 상황에 처합니다. 16,17절을 보면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포기합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 잔이 발견된 사람과 함께 고난을 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 가족의 변화를 봅니다. 그들은 같은 형제라도 자신만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제가 어려움을 당해도 자신의 것을 다 팽개치고 가서 구해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웃으면서 이 상황을 피해갑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변했습니다. 공동의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에게서 발견하는 변화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44:17이 상황을 보십시오. 유다가 변명하기에 좋은 상황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가서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18절입니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창44:18유다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오라고 한 사람은 당신 요셉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이 아들 만은 절대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설득해서 데려왔는데, 베냐민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우리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유다는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를 향해 이런 마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생각하십시오. 젊었을 때에는 힘 있는 아버지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늙어서 힘이 없는 아버지는 내가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죽을지언정 약속의 근거인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붕괴되는 가족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중요합니다. 너무 무너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는 현실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야곱에게서 열 두 아들이 나게 하셔서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번까지 공부할 때에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제대로 된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관계를 하고, 살인을 하는 등 형편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굉장히 답답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제와 보니까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변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젊었을 때 자기 멋대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끔 만들어 가십니다. 특별히 유다지파는 예수님의 족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여기에 제 마음에 희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내 과거와 상관없이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상관없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줄로 믿습니다. 과거에 실수가 있었고, 미숙했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조금씩 만지고 회복하십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많은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었지만 마지막이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 또한 마지막이 아름답고 좋습니다. 창세기 50장중에 48장에 헷갈리는 이야기이고 마지막 2장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헷갈리고 뒤집어 지고 난리치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 이것이 선택된 백성의 삶입니다. 이것이 형들을 통해 듣는 메시지입니다. 유다가 계속해서 이렇게 요청합니다.
32,33절입니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44:32-33유다는 여기에서 자기 생명과 바꾸는 아름다운 청원을 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비밀입니다.
생명을 바꾸는 중보기도를 하십시오. 우리는 대가가 없고 손해가 없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시간 내서 만나고 기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도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입니다. 이런 중보기도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는 하나님 앞을 아브라함은 가로막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시려는 하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죽을 지라도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이런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는 십자가를 붙들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민족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립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놀이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점에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에 이런 복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의 이러한 행동은 요셉이 지난날 가졌던 상처를 말끔히 씻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유다 뿐 아니라 형들이 시험에 합격하여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결과를 갖고 왔습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베냐민에 대하여 22번이나 부르며 호칭했고 야곱에 대해 말함으로 요셉의 동정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즉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게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로서 요셉의 기대는 다 충족되었습니다.
유다는 지난날 동생을 팔았던 과오를 진실히 회개했으며 늙은 아버지에 대한 애뜻한 사랑, 범죄한 베냐민에 대해 책임을 떠 넘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떠 맡겠다고 말한 것은 요셉이 기대했던 모습이었습니다.
공동체가 반목질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한 사람의 약점이나 범죄가 드러나면 모두가 공격을 하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킵니다. 지금 베냐민으로 인하여 위기 상황에 처한 유다는 동생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인질로 나섭니다. 결국 이러한 리더쉽은 유다 지파가 왕의 지파로 쓰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왕의 리더십이 있습니까? 왕의 리더십은 탓하지 않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왕은 나라를 책임지는 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왕권을 가진 자로 살아가려면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먼 우리가 이 땅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어찌되던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2025년 8월 23일 오전 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