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환경과 생명을 위하여
온 인류가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질서대로 환경을 다스리게 하소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낙태와 아동 학대 등 생명 경시 풍조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환경과 생명을 위해 일하는 관계자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효율적인 정책이 세워지게 하시고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창44:18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창44:18지금 베냐민이 애굽 총리의 금잔을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으로 팔릴 지경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유다가 애굽 총리 앞에 나가서 간청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유다의 간청은 이 아이는 늙으신 아버지께서 노년에 얻은 아들로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늙은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돌아가실 수가 있으니 그 아이 대신이 자신을 종으로 삼고 그 아이는 돌려보내 달라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요셉에 대해 공부할 때 요셉의 외형적인 모습과 내면의 모습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요셉의 외면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그 어려운 고난과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앙에 빠지거나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취급하십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옥에 들어가도 그의 마음은 요동치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키워주셨습니다. 요셉은 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처럼 우리 또한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갖가지 어려움과 오해, 고통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할 때에는 욥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을 합니다. 그 결과 훈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훈련만 받을 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은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요셉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요셉의 내면적인 모습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형들에 대한 그의 사랑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나한테 잘 해주는데 못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격려해주고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 말고 상황이나 상대에 상관없이 원수일지라도, 나한테 손해를 끼쳤을지라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배울 요셉의 사랑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는 줄 압니다. 여러분들이 봉사도 열심히 하는 것도 압니다. 헌신한 것도 다 압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오늘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하지 못하는 갈등, 사랑하면서도 고민하는 갈등,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기도 중에 치유되기를 바라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내면의 거룩함이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형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가를 보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의 사랑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고 있는 사랑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감정적인 사랑이나 상황적인 사랑,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고 예수님이 있는 사랑, 십자가가 있는 사랑이 여러분과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새롭게 역사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세 가지를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1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누구냐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따지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에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2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내느냐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거절하면 또 만나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균형이 깨진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것은 뭐든지 다 좋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습니다.
3진정한 사랑은 세월과도 상관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야 합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진정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시집살이를 호되게 했던 사모님은 며느리를 맞이하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딸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장가를 갔고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은 결심한 대로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마음에 며느리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사택에서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살았는데 시집 온 첫날부터 그때까지 시어머니가 해 준 밥을 먹고 출근하더라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새벽 기도를 다녀와도 그 시간까지 며느리는 잡을 잡니다. 시어머니가 아침을 다 해서 차려 놓으면 그 때에서 겨우 일어나서 밥을 먹고 출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 며느리가 해도 너무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랍니다. ‘언제는 안 그랬니?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니? 네가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예 그랬어요’ ‘네 딸은 어떻게 하니?’
가만히 보니까 딸도 여전히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을 먹고 출근하거든요. 그래도 딸이 접혀 밉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딸처럼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회개한 다음날 아침 새벽 기도를 다녀와서 아침을 준비하려고 부엌에 들어가니 며느리가 준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 계속 며느리가 아침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며느리가 변한 것은 없습니다. 시어머니인 사모님이 변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기에 며느리의 허물과 실수를 다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다 율법으로 변했습니다. 보상받기를 원하고, 대우받기를 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며느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변한 것입니다. 내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비유하신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되었는데,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제사장도 그냥 지나갔지만 어느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면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거기서 사랑의 놀라운 정의가 하나 나옵니다. 어떻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돌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사랑의 속성이 나옵니다.
1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도와주면 무슨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사랑과 똑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대상에 따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산하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의 사랑이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 되기를 바라고, 대상에 따라 여러분의 사랑이 변하는, 농도가 달라지는 사랑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은 손익계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내 시간을 얼마나 손해 보고, 돈은 얼마가 들고, 도와주고 난 후에 내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했기에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원수라도 필요하면 내가 간호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 것은 그가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주막에 데려가서 ‘이 사람을 돌보는데 들어간 돈은 내가 돌아오면서 줄테니 이 사람을 잘 돌봐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줬던 사랑의 질은 요셉이 했던 사랑의 질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하셨던 사랑의 질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사랑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기를 바라고, 상대방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이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사랑, 다 버리는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5장 5절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내 사랑은 바닥난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내 안에 없습니다. 성령이 그 사랑을 내게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내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중 첫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최대의 메시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안될까요? 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사랑이 오늘 이 아침에 부어지게 하옵소서.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옵소서. 내 사랑의 질이 바뀌게 하옵소서. 생각과 가치가 바뀌게 하옵소서.
나는 이것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셔야 계산하지 않는 사랑, 배신당해도 섭섭하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025년 8월 22일 오전 6: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