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 지역 사회의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도 충만하게 하시고 모든 예배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복과 부흥이 있게 하소서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소서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창41:9-1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창41:9-13만약 이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풀이해준 요셉을 출옥 후 잊지 않고 출옥하자마자 꺼내 주었다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에게는 고뇌에 찬 2년의 세월은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이 이제 그것을 생각하고 바로에게 고함으로 비록 2년의 잊혀진 세월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언뜻 보기에는 이 잊혀진 세월을 필요 없는 것 같고 쓸데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적절한 때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잊혀진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40년이라는 잊혀진 세월 뒤에 민족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 수많은 날들을 잊혀진 체 광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광스런 등장을 위해서는 꼭 잊혀진 세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 없이는 결코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쉽게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꿉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값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기에 영광이 값지고 고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수시로 만나는 잊혀진 세월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잊혀졌다고 해서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나를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있어야만 하는 일들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이 기가 막힌 순간에 요셉을 생각해 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린 것이나 다시 생각난 것이 우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누구를 위한 섭리하심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필요하다면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애굽의 왕 바로를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술맡은 관원을 사용하시기도 하셔서 일들을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요셉보다 당시 바로 왕이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애굽의 왕까지 동원하셔서 일들을 진행해 나가십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이 보기에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미국의 대통령도 동원하실 것입니다. 아직 필요치 않거나 내가 요셉처럼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동원치 않으시는 것이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든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기다릴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어떤 것이든 동원하시지 않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지어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구까지 동원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동원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독생하신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동원하신 하나님이 다른 것은 동원 하시지 않겠느냐? 미국의 대통령도 필요하다면 동원하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대통령뿐만 아닙니다.
히스기야를 위해서는 일영표의 그림자를 뒤로 십도나 물러가게 하시지 않습니까? 즉, 자연도 동원하시고 우주도 동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저와 여러분들은 값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세월을 걷는다 해서 낙망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셉도 이 어두움의 세월을 통해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빅단과 데레스 두 경호원이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모르드개가 알아채고 신속히 보고해서 왕이 살고 두 사람은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왕의 생명을 살려주고도 상하나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만 총리의 미움을 받아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달려 죽게 됩니다.
모르드개가 처형되기 전날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으니 신하에게 궁중 일기를 가져다 읽게 합니다. 신하가 궁중 일기를 펴서 읽는 곳이 마침 모르드개가 왕을 살린 사건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 순간 왕은 아찔합니다.
‘모르드개가 아니었다면 오늘 내가 없었구나!’
‘그 모르드개에게 큰 벼슬을 내렸느냐?’
‘아무것도 베풀지 않은 줄로 아룁니다.’
‘허허, 무심했구나. 내가 실수했도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모르드개를 높여야 되겠다.’
그때 하만이 들어왔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모르드개를 높은 장대에 달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오히려 하만을 그 나무에 달아 죽이고 모르드개에게 총리 일을 맡깁니다.
하만은 자기가 세운 나무에 자기가 달려 죽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억울할 일이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잘 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나는 이렇게 바로 살아도 어려운데, 저 악한 자는 이래도 저래도 잘 되는구나.’라며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얼마나 많은 제사장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습니까? 우상을 섬기고, 바알을 섬기고, 우상 섬기는 자들을 다 등용했습니다. 그래도 아합은 병에 걸리지도 않고 건강했지만 결국 전쟁터에서 죽고 그 피를 개가 핥아 먹습니다. 그렇게 악한 이세벨도 나이가 들어도 늙지도 않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죽고 난 다음에 열왕기하 9장에 보면 발코니에서 예후를 보고 있는 이세벨을 내시가 집어 던집니다. 이세벨이 땅에 처박히면서 옆에 있는 말과 담장에 그 피가 튀니 개들이 모여와서 시신을 뜯어 먹어 두개골과 손과 발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0장에 보면 아합 왕의 왕자 70명이 한날에 다 목이 잘려 광주리에 담겨 예후에게 보내집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바르게 심으면 바른 것을 거두고, 악하게 심으면 악한 것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의로 살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여 주십니다. 그 때는 반드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피어나게 하는 때가 다가옵니다.
저의 때, 여러분의 때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잘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는 것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탈무드에 ‘오늘은 최초의 날이요 최후의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일생의 막이 언제 내릴지 모릅니다.
프랑스 작가인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어오셔서 우울한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시간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내일부터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프랑스어는 이제 더 이상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으니 집중하여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프렌츠라는 아이가 가슴을 칩니다. 노는 것만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해서 이제 겨우 글자를 쓸 수 있는데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프렌츠야, 너 이것 한 번 암송해 보아라.”
그는 그것을 암송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막혔습니다. “프렌츠야, 네 잘못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지금 충분히 뉘우치고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뭐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라고 하지만 아니야. 오늘 못한 것을 내일도 못할 때가 온다. 그것이 바로 오늘이다. 프렌츠야, 네가 불어를 배울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마지막인 때가 옵니다. 우리 충성이 마지막일 순간이 옵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가정에 선하게 심고, 회사에 충성하고, 사회를 밝게 하고, 나라를 살리고, 특별히 하나님 교회에 귀하게 충성하는 기회를 붙잡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5년 7월 23일 오전 6: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