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 지역 사회의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도 충만하게 하시고 모든 예배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복과 부흥이 있게 하소서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소서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창33:15-16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창33:15에서는 동생인 야곱과 헤어질 때 두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두 가지 제안은 무엇입니까?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창33:12"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창33:15야곱은 형의 이런 호의에 대하여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습니다. 야곱이 형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33:13-14이에 에서가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야곱을 보호해 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도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의 평화에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슴도치의 사랑입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고슴도치 같은 이기심의 가시가 있습니다. 죄악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만나야 합니다. 소금되신 예수님을 두고 화목해야합니다.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키고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서로를 배려해야합니다.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한 야곱이 에서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호의를 거절하면 에서가 화를 내고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형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외삼촌 라반의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 형 에서의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찬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야곱이 형의 호의를 거절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창33:16에서가 사는 세일은 야곱이 가고자 하는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살던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창35:27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세일과 헤브론은 정반대 방향입니다. 지금 야곱이 있는 얍복 강에서 세일은 남쪽에 있고, 헤브론은 북쪽에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형이 남겨준 형의 종 몇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안전하게 빨리 갈 수는 있지만, 야곱이 가야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새 공원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새 공원엔 600여종의 새들이 수만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새 공원에 그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만 마리의 새들 중에 이 공원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새들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다 그 안에 삽니다. 훈련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공원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새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일이 없는 이유는 새의 꼬리를 다 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옆 날개는 있는데 꼬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로는 날 수 있고 점프는 할 수 있지만 멀리 날아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잡아 주는 꼬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그냥 내려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만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방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학문의 날개를 달고 인생의 경험이라는 풍부한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멀리 날지 못합니다. 이 역시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고후 6:14).
저는 목회 현장에서 인생의 방향이 서로 다르므로 눈물 짓고 살아가는 자매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인생의 방향이 서로 다르면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있어도 인생의 방향이 서로 다르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인생의 방향이 같으면 함께 무릎을 꿇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누가 행복한 자입니까? 어려운 중에도 함께 손을 맞잡고 함께 찬양을 드리며 함께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인생의 방향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누가도 인생의 방향이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로서 부를 누리며 세속적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하고 평생을 바울의 동역자로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나갔지만 누가는 초지일관 변함없이 늙은 사도인 바울과 함께했습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바울과 함께 울고, 바울과 함께 웃고, 바울과 함께 헐벗고, 바울과 함께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바울과 함께 굶주린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목적이 자기의 목적이었고 바울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었으며 바울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속도 경쟁의 시대입니다. 컴퓨터 제왕이라고 불리는 빌 게이츠는 ‘현대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시대가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속도에서 밀리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방향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목표물에서 멀어집니다. 오늘날 방향을 잘못잡고 뛰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아무리 내봤자 소용없는 짓입니다.
인생은 레이싱 경기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생에서의 성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방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오히려 빠른 것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계보다는 나침반입니다.
얼마나 빠른가 보다, 얼마나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리가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방향이 맞으면 설령 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도를 높이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속도를 높여 더 빨리, 그리고 남들보다 더 멀리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리 남들보다 멀리 간들,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때론 계속 달리는 것보다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여유도 필요합니다. 그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달려도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고 달려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찬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줄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우리의 신앙은 빨리 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특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속도라면 더욱 위험합니다.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즉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속도를 내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방향이 잘못 될수록 더 빨리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콜로 메이는 ‘인간은 길을 잃었을 때 더 빨리 뛰어가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면의 불안 때문입니다. 방향이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 늦더라도 초초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억력을 주신 것은 과거를 회상하며 교훈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자동차에는 브레이크와 핸들이 있습니다. 브레이크는 속도를 조절하고 핸들은 방향을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서야 합니다.
2025년 5월 25일 오후 12: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