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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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1나라를 지키며 정의와 평화를 힘쓰는 국군 장병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모든 훈련 가운데 건강과 안전을 지켜 주셔서 군 생활을 잘 마치게 하소서

2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장병들이 영적 광야인 군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고 이들을 통해 군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3각 부대에 신실한 군목과 군종 사병이 세워져 군 생활 중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장병이 늘어나게 하시며 지역 교회와 군인교회가 연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소서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창30:2-8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창30:2

라헬의 감정 폭발은 예상대로 야곱을 격노케 했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29:31

라헬은 그의 언니를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고 언니를 시기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과 인간 라헬이 보는 시간은 이렇게 차이가 났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레아는 아이를 잘 낳는데, 라헬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야곱이 아닌 라헬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으리라’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는 라헬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자녀를 기다렸던 사라나 리브가와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창30:3-5

여러분, 부인에게 성내지 마십시오.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라헬은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라헬은 남편에게 혼이 나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려야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지는데 라헬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내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낳자’라고 결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오기와 자존심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헬은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한테 첩으로 주어서라도 레아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라헬은 몸종을 통하여 아기를 낳으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심 때문에,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한 여자를 씨받이로 이용한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이 당시에 사회적으로 용인된 풍습이었다고 변호할 수도 있습니다. 실은 라반이 그의 딸들에게 각각 여종을 준 것도 바로 이 목적 – 불임에 대한 대책 – 이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인간적으로, 그 시대 사회적으로 볼 때 이 행동은 이해할만하고 정당시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증거로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잘못된 제안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 없이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화를 내고 시샘하는 부인을 이해하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하나님이 아이를 주지 않으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다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야곱은 라헬의 생각을 덜컥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결과는 비참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의 가정이 복잡해지고 갈등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신앙과 인간적인 생각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야곱은 라헬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고 라헬은 아무리 속상해도 인간적인 혈기로 그런 제안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또 다른 두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창30:6

라헬은 빌하에게서 아들을 얻자 “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레아에 비해서 남편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라헬이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억울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라헬은 빌하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단이라고 짖습니다. 히브리어로 단은 판단하다. 잘못을 바로잡다 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빌하의 출산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잘못이 바로 잡혔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이라는 아이가 태어난 동기는 질투입니다. 부모의 축복 속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넷씩이나 낳은 언니에 대한 질투와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 태어나게 된 아이가 단이었습니다. 창49:16∼18절을 보십시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단은 독사와 뱀 같아서 다른 지파를 공격하는 싸움꾼 같은 지파로 변합니다. 싸움꾼은 편한 날이 없습니다. 단 지파에서 태어난 유명한 사람이 삼손입니다. 그리고 단 지파는 훗날 우상숭배를 합니다.

또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명중 단지파가 빠져있습니다. 단 지파는 이런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런 단지파도 제사장의 가슴에 보석 중에 하나로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위나 지나온 과거로 보면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보석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단이 태어났지만 라헬의 분노와 질투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라헬은 또 아이를 낳도록 몸종과 야곱을 부추깁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창30:7-8

라헬이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몸종이 낳은 아이가 납달리입니다. 라헬은 ‘아이가 태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형을 이겼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형과 경쟁해서 이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처럼, 야곱의 아내 라헬도 그의 언니와 경쟁해서 이기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납달리였지만 단과 달리 복을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복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창49:21절에 납달리를 위한 축복의 표현이 나타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창49:21

매우 시적인 표현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에 갇힌 암사슴은 슬픈 짐승이지만 우리에서 풀린 암사슴은 산을 뛰어노는 자유로운 짐승입니다. 납달리는 들에서 뛰노는 자유로운 암사슴같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신33:23절에서 납달리에 대해 다시 한번 예언을 합니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찌로다

납달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지파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납달리가 거하던 땅이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 서편에는 지중해가 있고 남쪽에는 갈릴리 바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푸셨던 수많은 기적과 설교가 바로 암사슴이 뛰어노는 것 같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였고 여호와의 복이 쏟아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이라는 개념에 혼동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권선징악입니다. 착한 사람은 상 받고 나쁜 사람은 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은 행 한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념은 다릅니다. 우리가 행 한대로 하나님이 갚으시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주는 은혜가 아니며, 우리가 복받을만한 행동을 해서 받는 복도 아닙니다. 물론 복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잘 봐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나쁜 짓하고 망나니짓하는 것이 싫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식을 좋게 생각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이렇지 않았다’라든가 ‘원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자꾸 좋게 생각하려고 하고, 잘못을 감춰주려고 하고, 나쁜 동기로 행동했어도 좋은 동기로 생각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맞아 싸다’라고 생각 합니다. ‘저들이 나쁜 짓한 것은 매 맞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잘못 했을 때는 누군가 용서해주고 감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을 저지른 이가 살아납니다. ‘너는 행 한대로 다 받아라’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누구든지 다 죽습니다. 지상에는 떳떳한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보호해주고 변명해 주고 감싸주지 않으면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 앞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성이나 학벌, 가문 같은 것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숨겨주시고, 우리 죄를 눈과 같이 씻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못 본 척하셔서 희망을 주시고 축복의 자녀로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심장의 한 복판에는 여러분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하나님의 대행자로, 하나님의 얼굴로, 하나님의 편지로 사용하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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