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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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1.

무슬림 가운데 역사하셔서 닫혔던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2.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미디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이슬람의 전략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폭력이 끊어지게 하소서.

3.

영혼을 속이고 어둡게 하여 멸망시키는 이슬람의 악한 영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29-3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25:29-30

어떤 의미에서 에서는 열등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열등감이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대개 큰 아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첫 아이에게는 이상적으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의욕이 많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버지의 이상을 따라가 주지를 못 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아들은 아버지하고 항상 싸우고 일대일로 대결을 하려고 듭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더 태어나면 아버지 쪽에서 너그러운 태도로 자녀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이 희생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상처를 한참 주고 나서야 ‘이것이 잘못됐구나’ 하고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은 후입니다.

29, 30절을 보면 이런 편애를 받은 형제 사이에는 언제나 사고가 생기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고는 아무 것도 아닌 사고였습니다. ‘단팥죽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단팥죽 사고가 이렇게 큰 사고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야곱이 죽을 쑤고 있을 때 마침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동생이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 단팥죽을 끓이고 있었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에서는 단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들로 산으로 다니기를 좋아하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와 달랐습니다. 그는 늘 집에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일생을 보면 욕심과 야망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표현도 안하면서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고, 겉으로는 항상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 지 모르는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이 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부러워하고 넘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했던 형이 단팥죽을 한 그릇 달라는 것입니다. 꾀가 많은 야곱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창25:31

야곱의 관심은 단팥죽도 아니고 형도 아닙니다. 야곱은 기회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형의 장자권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장자권의 축복이 무엇이며 정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물질적 가치관을 가졌던 사람이고 야곱은 영적인 가치, 정신적 가치가 중요한 것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배가 고픈 에서에게 단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장자권을 자기한테 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비록 야곱이 내성적이고 나약한 사람이고 형의 그늘에서 살아왔던 사람이지만 장자권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높이 사야합니다. ‘영적 가치, 신앙의 가치’가 내가 지금 당장 배부르고 쾌락을 누리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에서는 들에서의 사냥꾼이었지만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사냥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얻어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얻은 성공은 교활하게 얻은 성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활합니까?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치가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얻은 성공, 그가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25:32

에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장자의 명분의 가치를 몰라서 장자의 명분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런 에서의 논리가 설득력 있는 사회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가의 모든 예산은 여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경제나 정치 논리가 신앙보다 앞서고 있습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우선이지 신앙이 무엇이 중요하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창25:33

야곱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가지려고 할까요? 도대체 장자의 명분은 무엇입니까? 장자는 유산을 받을 때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 배를 받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 가문을 대표합니다. 즉 가문의 후계자가 됩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가문의 후계자 정도가 아니라 구속사역의 후계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복을 받는 조건이 바로 ‘장자의 명분’에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바로 이런 축복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태어날 때는 동생으로 밀렸지만, 살면서는 밀리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 동생이라고 해서 일생 동생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운명에 도전하여 새 인생을 창조하고자 한 겁니다.

그런데 왜 에서는 그런 장자의 명분을 팥죽과 바꿔버렸을까요? 도대체 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34절을 읽읍시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34

에서의 문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데 있습니다. 그는 팥죽은 무겁게 여긴 반면 장자의 명분은 가볍게 여깁니다. 팥죽과 장자의 명분,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공통점은 둘 다 실제 삶 속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삶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려면 팥죽도 있어야 하고 장자의 명분도 있어야 합니다.

차이점은 뭘까요? 팥죽이 현재적이라면 장자의 명분은 미래적입니다. 팥죽은 당장 유익이 있지만 장자의 명분은 당장보다는 미래에 유익이 있습니다. 에서는 무형의 가치보다는 현실적 유익을 더 가치 있게 여긴 겁니다. 역사는 그런 그를 ‘망령된 자’라고 평가합니다. (히12:16)

반면 야곱은, 팥죽은 가볍게 장자의 명분은 가치 있게 여깁니다. 야곱은 당장의 유익보다는 미래적 유익을 더 가치 있게 여긴 거고요. 하지만 막상 배고플 때 명분이 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명분을 지키다가 삶의 현장에서는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팥죽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명분을 택할까요? 사물을 보는 눈, 즉 ‘렌즈’에서 옵니다. 어떤 ‘렌즈’를 끼느냐에 따라서 사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안경을 쓰는 것은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경적 ‘렌즈’로 세상을 보면 성경적 가치가 아주 잘 보입니다. 반면 세상적 ‘렌즈’로 세상을 보면 세상적 가치가 아주 잘 보입니다.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 ‘렌즈’를 다른 말로는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가치관은 사람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가치관에 따라서 삶의 스타일이 결정되고, 삶의 목적이 결정됩니다.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 또한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에서가 팥죽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가치관이 먹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에 목숨을 건 것도, 그의 가치관이 미래적인 유익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라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을까요? 팥죽이 먹고 싶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는 참습니다. 아니 참을 수 있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그의 삶을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장자의 명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팥죽보다 못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렌즈’로 보면 정말 귀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이 아닌 내일을, 땅이 아닌 하늘을,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소망하며 삽니다. 내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유익을 바라며 삽니다.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값싼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내의 대기업인 모 기업의 임원 한 분이 갑자기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 어느 지역에 들어와 목장을 한다고 하면서 버려지는 농가나 불모지에 가까운 임야나 산들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젖소를 풀어서 방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 왔습니다. 대기업 임원이 낫지 어찌 농부가 되려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젖소를 방목하며 키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땅을 팔지 않던 주변의 농부들도 자녀 학자금 마련을 위해 혹은 도회지로 돈 벌러 나가면서 하나 둘씩 목장주인에게 땅을 헐값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래서 수회에 걸쳐 10여 년 동안 주변의 수십 만평의 산과 임야를 비교적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이 광활하고 넓은 산과 들에 젖소들은 온데 간데 없고 포크레인과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는 요란한 굉음만 계속하여 들립니다.

바로 여기가 동양에서 알아주는 엄청난 석회석 매장량을 가진 시멘트 광산이 탄생된 곳입니다. 만일 시멘트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지하에 무진장 묻혀있다고 발표하면 어느 누가 헐값에 땅을 팔아 넘겼겠습니까? 그 가치를 알지 못하니 헐값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된 알래스카는 한반도 면적의 여섯 배가 넘는 광활한 땅으로 일년내내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동토입니다. 1867년 재정상태가 어려웠던 러시아 황제는 알래스카를 쓸모없이 땅만 크고 얼음만 덮여있어 관리하기도 어렵다는 구실로 단돈 7백 2십만 달러에 미국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런데 알래스카는 국방과 항공노선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석유는 물론 각종 희귀한 광물자원이 묻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치의 땅으로 변해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로 세계적인 상업. 금융. 문화중심지로 변모한 뉴욕의 맨하탄 역시 18세기 초 인디언으로부터 30달러에 넘겨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에 대한 값어치를 알지 못하고 소홀히 대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얻습니다.

첫째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제 지표나 실물경제나 외환규모나 실업률, 경제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가치가 도덕이나 윤리나 정신적인 가치보다 앞설 때 나라는 붕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망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자의 명분이요, 영적인 특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뺏겼고 결국은 야곱한테 축복이 넘어 가고 말았습니다.

야곱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인간적으로나 인위적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복은 강탈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복은 순리이어야 합니다. 무리수를 두면 복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인위적이고 인간적으로 이 복을 가져오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국가 경영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복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을 써서 남의 것을 빼앗아 오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인내와 기다림과 양보와 타협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고 이루어 낼 때 거기에 정신적 영적 가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좀 더 기다려야 했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꾀와 수단과 방법을 개입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적 중에 기적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야곱입니다. 아버지 중에 실패자요, 상처가 많고 사랑받기 힘든 사람이 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말1:2-3

왜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까? 야곱은 장자권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 기도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인간 됨됨이가 뛰어나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인격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과 소망이 있습니다. 야곱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면 여러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야곱이 자신의 교활함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자 어머니 리브가가 남편을 설득하여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냅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28:15

그리하여 그는 무려 20년간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며 깨어져야만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깨어지지 않은 인격 때문에 얻은 결과였습니다.

남의 돈을 빼앗아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될 수 있지만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부는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올수록 기뻐하고, 환란이 올수록 감사하고, 위기에 처해 있을수록 기도와 인내로 승리할 때 하나님의 승리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025년 2월 22일 오전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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