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대통령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정치 지도자들이 권모술수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게 하소서.
이 땅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당의 이익에서 벗어나 서로 협력하여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시며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소서.
주변 강대국과의 경제, 안보 갈등이 조속히 해결할 수 있는 외교 정책이 수립되게 하시어 한반도의 평화적 정세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창22:7-9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7드디어 이삭이 입을 엽니다. “내 아버지여”
아마 아브라함의 소원은 이삭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입을 열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아브라함의 대답에는 너무나 깊은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드려야만 하는 기막힌 고통과 아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곧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늘 이삭을 데리고 제사를 드리러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22:8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신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의지도 아닙니다. 믿음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고백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22:5"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22:8믿음은 자신이 믿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7:29"예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마8:10-13"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17:45-47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고백하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지만 기적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십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이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번제할 어린양을 선물로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창22:9이 말씀에서 흔들리지 않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공할 때 뿐만 아니라 실패할 때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잘 되거나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잘 믿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부딪히거나 절망에 빠지면 쉽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믿음을 쉽게 포기하려 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죽여야 하는 엄청난 이 사건 앞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의외로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보입니다. 참된 믿음이 생기면 죽음 앞에서도 담담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에 도착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은 단을 쌓았습니다. 나무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을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갑니다.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리를 잡은 후 이삭이 지고 온 나무를 차곡차곡 쌓습니다. 이러한 것을 과연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이삭은 죽어야 하는 자리고 아브라함은 죽여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고 누가 봐도 다 좋은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기에 너무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아브라함은 단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아야 했습니다. 나무를 쌓는 일은 아들과 같이 했다 하더라도 아들을 묶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젊은 아들과 늙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는 묶을 수 없습니다.
소나 돼지를 끌고만 가도 힘이 듭니다. 닭 한마리를 잡으려 해도 난리가 납니다. 하물며 사람이 싫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삭이 반항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묶었다 하더라도 나무 단 위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이삭이 스스로 올라가 줘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는 죽어야 하고 아버지는 죽여야 하는 이런 절박하고 기막힌 현실 앞에서 담담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 값싸게 생각하고 감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고통과 대가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에 형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치뤄야 할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에 대해서도 원망하고 현실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아픔을, 고통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대가없는 순종이 없고, 순종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떤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돈 몇 푼, 시간 조금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생색을 냅니까?
그것 한 번 하는데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얼마나 주저합니까? 쥐꼬리만한 헌신을 하면서 엄청난 헌신을 하는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고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아팠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는지 아느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마치 온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협력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님을 억지로 세상에 보냈고 억지로 십자가에 달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10:17-18예수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으셨고, 당당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갔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방, 비난을 받으셨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스러울 때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으며, 목이 마를 때는 ‘내가 목 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은 그런 고통과 아픔과 순종을 통하여, 침묵을 통하여 구원을 이뤘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길 원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변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누군가 대가를 치뤄야 하며 누군가 순종을 해야 하고 침묵으로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수 천년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이것을 생각하시고 연습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양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로부터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 등 지속적으로 ‘내 아들을 줄 것이다’,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구약을 보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다’,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 ‘너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사7:14하나님은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와 때와 환경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출생할 여자는 동정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땅은 베들레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다 지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문제로 끊임없이 생각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는 것을 결정하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으로 인해 수 천년 동안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2025년 1월 8일 오전 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