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우리 가정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예배와 기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의 모든 관계가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소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바르게 양육하는 성경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되게 하소서.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속히 주님께 돌아와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혜가 있게 하소서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22:5-6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22:5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슬픔일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나귀와 사환들은 거기에 머물게 했고 이삭만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사환들을 데리고 가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막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특이한 사실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면 슬퍼하는 표현은 없고 ‘아이를 데리고 예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아들을 죽이러 가는데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죽이는 척만하고 그저 돌아오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해석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너는 복의 조상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10년 동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는데도 아이가 잉태하지 않자 아브라함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입니다.
늙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얻는 것은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고 사라가 90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말씀은 지켜지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늙고 환경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아브라함은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흔들렸지만 이삭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방법, 지식, 이성,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은 변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와 행복하게 살다가 아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붙잡은 약속은 어떤 약속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이스마엘)나 네 여종 (하갈)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창21:12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고 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순종을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이삭을 다시 살려줄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는 ‘이삭은 다시 산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내 생각이나 환경, 이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내 정신력이나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겼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악한 권세와 죽음의 권세와, 질병과 절망과 좌절을 꺾으시고 영광가운데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의심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하자 마르다는 태도를 바꾸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인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고난이나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승리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는 분이시다’라고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구이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달라고 요구하실 때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포기할 줄 압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크라이막스는 ‘포기’와 ‘순종’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은 이삭을 데리고 번제하러 가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예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번제’는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배로 승화됩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죽음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건은 우리에게 예배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번제가 예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는 내 아들 이삭을 죽이러 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번제는 예배로 바뀌었고 예배는 부활로 바뀐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번제 전에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22:6아브라함은 함께 따라온 사환들과 나귀를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함께 약속의 장소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아들 어깨에 지워 줍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과 같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진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번제로 드려져야할 텐데 그 번제 할 나무를 이삭이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졌고, 이삭은 자기를 태울 나무를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질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쉬워질 수 있는 비결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거운 이유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집하면 십자가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면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와 가정과 민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져야할 나무를 어깨에 메고 하나님이 약속한 장소로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손에는 불을 지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무서운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아들을 무섭게 하거나 아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불을 가진 모습은 마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은 어떤 언어보다 무서운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을 직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동안 고통을 겪지만 하나님은 몇 천년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였지만 아들을 내어준 하나님의 고통하는 마음은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만 어떤 자식도 부모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모두 다 자기가 잘난 줄 압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그렇게 자란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우리가 성장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학교에 등록금을 내기 위해 고생을 했고, 자존심 상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하며 기다리셨는지 아브라함은 삼일동안 경험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깨달을 때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고 겸손해집니다.
2025년 1월 7일 오전 6: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