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청년 세대들을 위하여
이 땅의 청년들이 대세가 아닌 진리를 따르고 야망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한 비전을 품고 전진하게 하소서.
세상의 무분별한 가치관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켜 주시고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세대, 기도로 기적을 일으키는 부흥의 세대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세대, 기도로 기적을 일으키는 부흥의 세대가 되게 하소서.
성적 타락 및 각종 중독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켜 주셔서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친히 인도하여 주소서.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22:1시험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다른 말이 있습니다.
첫째, 한국말로는 시험이지만 영어로는 ‘유혹’이라고 부르는 시험이 있습니다. 템테이션(Temptation)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지도 시험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격을 점검하는 ‘테스트’와 유혹을 받는 ‘템테이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뿐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걸리면 방탕하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여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게임 중독, 쾌락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을 망치려는 것이 마귀의 계획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망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두 눈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금, 은, 외투에 유혹되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시험에 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유속입니다)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유혹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유혹에 드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시험은 ‘시련’이라는 시험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의 속성은 반드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아직 시련을 다하지 않은 믿음은 단지 관념적인 실제일 뿐이지 현실적으로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논리가 아니기에 논리적인 차원에서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직 살아있는 순종은 통하여 조용히 역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장 혹독한 시련에 두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확증하셨다. 믿음이란 신자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 양도함으로써 증명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의 시험으로 테스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항상 결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이삭을 죽이시려 함이 아니라 살리시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22:16-18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0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함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시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믿음의 수준에 맞추어 시험하시고, 시험이 없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고 아직도 복 받을 수준, 믿음의 성숙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니라.”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을 점검하는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가혹한 테스트였습니다. 그 시험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그 사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목표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한 부분이 시험 받을 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즉, 자신이 100세에 얻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랑거리이자 애지중지하는 최대의 약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정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믿음은 아들을 얻었듯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주신 것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듣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100%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100% 믿음입니다. 만일 50%만 신뢰한다면 50% 믿음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얼마만큼 신뢰하고 자신을 내려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비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유한한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곧 숨이 넘어가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인가 붙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뜻에 집착하기 때문에 교회를 평생 들락날락해도 믿음의 세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합니다. 그저 종교적인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없는 것은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고 ‘너를 포기하라’라고 하지 않고 ‘네 자식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 대부분 자식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암에 걸린 자식이 죽어갈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대신 죽을께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나의 생명과 존재보다 더 귀한 것을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포기의 강도가 높아지면 믿음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포기하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할까요? 유한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나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상장, 훈장을 갖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연예인교회를 할 때 유명한 여배우가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대종상을 받고 영화상을 받은 것을 제 장농에서 치워 버렸습니다. 그것이 나를 속여 왔습니다. 내 인생을 속였습니다. 그 화려한 사람들의 음성과 인기에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네가 아니라 네 아들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들을 번제로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떠내 보내거나 그냥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달라고 하십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와 명령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큰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먼 훗날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아들을 온 인류를 위해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스스로 죽으면 안됩니다. 이삭이 죽는 방법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죽거나 누가 죽이면 안되고 번제로 드려져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칼을 들어 죽여야 한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들을 달라고 하면 그저 주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안됩니다. 아버지가 칼을 들어 아들의 심장을 찔러야만 합니다. 아버지는 고통 없이 아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기막힌 심정으로 아들이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고 고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과 동일한 일을 아브라함을 통해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피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고통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이삭은 안방이나 논에서 죽일 수 없고 산에서 죽여야 했습니다. 먼 길을 가서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삼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삼일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과도 같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가는 이삭이 함께 가는 길에서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브라함에게 3일의 시간은 3백년 이상의 긴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은 수천년을 넘는 긴 고통의 시간입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죽임을 당하기 위해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등에는 아들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리스도를 붙잡았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 세상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만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테스트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하게 아들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복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복을 받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5년 1월 5일 오후 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