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다음 세대를 위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고 새벽이슬과 같은 주의 용사들로 세워지게 하시며 젊은이들이 땀 흘려 수고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게 하소서.
음란하고 혼탁한 문화, 각종 중독으로부터 저들의 생각과 육신을 지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해답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기독교 가치로 세워진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방해하려는 모든 악한 세력의 행보가 무너지게 하소서.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26:16-2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행: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여기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분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첫째, 종의 신분입니다.
옛날에는 사무실에서 막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환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종인데 집에서는 종이라는 말을 잘 안 썼고 머슴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은 머슴입니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대가 바뀌어져서 이런 머슴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개념은 우리가 예수님의 머슴이라는 것입니다. 머슴은 자신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과 뜻에 따라야 합니다. 머슴은 무조건 순종하고 그 일에 대해서 기뻐해야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머슴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머슴의 특징은 일하는 만큼 대접을 못 받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러분 머슴으로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은 머슴 취급해도 괜찮으십니까?
또 하나의 신분은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 분을 높이고, 그 분을 찬양하고, 그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머슴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개념입니다. 종으로 시작해서 머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이렇게 아름다운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26:17-18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죄 사함을 얻어서 거룩한 무리가 되게 만드시는 것이고, 그 거룩한 무리들 가운데서도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17절)"--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보냄을 받아야합니다. 보냄 받지 않고는 전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4,15절에서 말씀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18절)"
돌아오게(transforming) 하고--여기에 중생(conversing)케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생각을 돌리고, 뜻을 돌리고, 생의 의미를 바꾸고 - 그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죄 사함 얻고 - 예수 믿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죄 사함 받는 데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 거룩하게 되어'- 성화, 믿어서 거룩하게 되고,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확실한 구원론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게 하리라(18절)" - 이것은 하늘나라의 기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9장에 보면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이제 앞으로 할 일을 네게 말할 자가 있으리라'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보내십니다. 바울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명령만 하십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종과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오직 주님의 종으로만, 오직 주님의 사람으로만 평생을 살아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중요한 결론인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26:19-21사도 바울은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한 일로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와서 재판을 받게 된 동기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겪는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여러분이나 제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민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두 자기 문제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잘못 관리하고, 내 인생을 잘못 관리해서 생긴 것입니다. 대부분 욕심이나 어떤 이기적인 동기 때문이지, 예수님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미혹되거나 자기가 잘못하여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빨리 이 고난을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겪는 고난과 우리가 겪는 고난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이치에 맞든 안 맞든,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신념과 철학과 일치되느냐 일치되지 않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 하늘에서 내게 계시해주신 그것에 내가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자세입니까?
전설 같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정론을 주장했는데, 특별히 이중예정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에 갈, 구원받은 사람이 예정됐다 하고 보니까, 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예정됐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후대 사람들이 이것을 이중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예정됐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지옥에 갈 사람도 예정됐다는 것은 영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질문하고 아무리 설명 들어도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칼뱅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제자가 또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이제 임종이 가까이 왔는데 그 이중예정론을 취소할 마음은 없습니까?"
칼뱅은 빙그레 웃으면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Bible says so,-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아는 대로는, 내가 연구한대로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나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서 성경이 멎는 데서 멎었노라. 그것이 나의 신학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참 대단한 말입니다. 성경대로 순종했다 - 이치에 맞고 안 맞고는 자기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납득이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는 '하늘로부터 보여주신 것, 하늘로부터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증거 했고,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그래서 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매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얼마나 간결하고 얼마나 확실한 고백입니까? 하늘로부터 보여진 것을 그대로 순종하고 이 시간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딱 잘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이 시간, 그는 유대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릅니다.
또한 그는 말씀합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이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더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나를 보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귀한 말씀이예요.
'내가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많은 환난을 겪었지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2024년 4월 26일 오전 6: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