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무슬림 가운데 역사하셔서 닫혔던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미디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이슬람의 전략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이슬람을 버리고 회심한 주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그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소서.
영혼을 속이고 어둡게 하여 멸망시키는 이슬람의 악한 영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26:14-1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이 귀중한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무죄임을 증명해서 석방되어보려는, 자기 구제를 위한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기회만 주어지면 내 명예에, 내 물질에, 나 자신에게 이롭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이 바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중대한 시간이지만 자기 구제를 위한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소중한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위대합니다. 나야 살든 말든, 잘되든 못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에 이르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려 하는 간절한 충정이 마지막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재판하는 이 중요한 시간에 그는 다시 담대하게, 또 요령 있게, 간결하게,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4우리가 - 내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라는 말은 사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일행 전부가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사건은 사울이 혼자 체험한 것이 아니라 일행이 함께 경험한 것입니다. 그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동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13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 이것은 공동적인 것입니다. 다 같이 본 것입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14절)" 다 같이 쓰러진 것입니다. - 이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환상이야 혼자서 보지 다 함께 보나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라는 말은 그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더욱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보다 밝은 빛이 내려와서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졌다
가만히 보면 함께 경험한 것이 있고 개별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9장에서는 '저들은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못 봤다는 얘기입니다.
또 22장 9절에서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빛은 다 같이 보았지만 "사울아" 하시는 소리는 사울만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같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사람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세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엘리 제사장은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삼상3:4-8그러니까 어느 부분에서는 공동적으로 경험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우리가 공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명돼서 개별적으로, 지극히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비로운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는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14절)"하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4여기에 바울로서는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주님을 박해했습니까? 나는 교회를 박해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 예수님을 언제 박해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그가 스데반을 죽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10:40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주의 종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박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곧 주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이 관계를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말씀이 본문에 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본문에만 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바울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은 쉽게 이해합니다.
이 말은 헬라사람들이나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있는 하나의 속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의 풍속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소나 말을 길들여 가지고 처음으로 밭을 갈든가 혹은 달구지에다가 멍에를 매어 가지고 끌고 가든가 할 때, 짐승이 앞에 가고 주인이 뒤에서 갑니다. 그런데 이 짐승이 아직도 길이 덜 들여져서 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골탕 먹이려고 가다가 뒷발질을 합니다.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주인은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송곳 같은 것을 만들어 뒤에다가 놓아두어서 뒷발질을 하면 딱 찔리게 만듭니다. 몇 번 찔리고 나야 이놈이 정신 차려서 뒷발질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는 가시채를, 가시나무가 엉긴 것을 둥그렇게 만들어서 뒷발 뒤편에 묶어놓습니다. 주인을 혼내려고 뒷발질을 하면 영락없이 제가 찔리거든요.
이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놈아, 내가 너를 붙들었는데 너 왜 뒷발질하느냐, 그 말씀이지요.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뒷발질하면 할수록 그가 손해입니다. 그러니까 '얘야, 버둥거리지 마라. 내가 너를 잡았다. 고분고분해라, 이놈아' '딴 생각 하지 말고 따라와라. 뒷발질하다가는 네가 당한다'는 아주 유머러스한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행여 뒷발질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붙들었으니 그대로 따라와'하고 딱 부러지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참 당돌한 사람입니다. 이런 경황에도 반문합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행26:15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절)" 끝입니다.
여기에 다른 질문은 더 필요치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더는 확인할 것도, 들어야 할 것도, 바랄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상황 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이렇게 확인하는 용기를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황이면 우리는 확인 같은 것을 해볼 엄두조차 못내는 게 보통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소리인지, 천사의 소리인지, 사단의 소리인지 마귀의 소리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신비는 신비다, 하고 돌려버리는데, 그럴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는 제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이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1절)"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것, 다시 말하면 좀 이상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뭐 이상한 것을 보았다, 탁 대면 쓰러진다……그러면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게 어떻다는 말입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물으세요. 확인하세요.
성경적이냐, 신학적이냐, 복음적이냐, 교회에 덕이 되느냐 - 딱 부러지게 물어야 됩니다. 그냥 멍청하게 넘어가지 마세요. '
주여 뉘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알았습니다'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2024년 4월 25일 오전 6: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