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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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북한을 위하여

1.

북한의 주민들이 주체사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김정은 3대 우상 체제가 무너지게 하시며 북한 전역에 있는 김일성 우상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2.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 세워져 있었던 3천여 교회들이 다시 회복되게 하시고 김일성 동상이 세워진 그 자리에 장대현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하여 주소서.

3.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과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그들이 속히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그날이 임하게 하시며 평화적 통일이 앞당겨지게 하소서.

4.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 주시고 탈북민들이 무사히 정착하여 북한 선교의 마중물로 쓰임 받게 하소서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26: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 장면을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일, 그리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중생한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만 세 번 나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사도행전 9장에서는 누가의 객관적 증거로서 그 당시 되어졌던 일을 사건대로 해설 없이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 22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많은 군중 앞에서 시달립니다. 그 때에 천부장의 호위를 받아가며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지난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발명을 하는 중에 '내가 경험한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달라진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오늘 핍박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이 주님을 만난 경험, 그리고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는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그가 유대나라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간증인 것입니다. 이 간증과 함께 생사의 문제가 결말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시간에, 결정적 시간에 다시 한번 그는 이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아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이 체험한 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대목을 잘 대조해서 읽어보세요.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이 세 대목을 보면 그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상세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더 상세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의미까지 더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귀한 신앙 간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마는 바울은 전도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수백 번, 수천 번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든지 이 말씀은 빼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체험에 대한 간증, 이 중요한 간증은 항상 반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지난날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에 책임자들로부터, 즉 대제사장과 그 권세들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26:12

권한과 위임을 받고 멀리 다른 나라에 도망 가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오려고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 받는다는 말은 헬라말로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사도라는 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영어로 Apostle이라 하는데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분명한 사명을 띠고 '대제사장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요샛말로 변신을 합니다.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의 사자가 예수의 사도로 변모를 합니다. 완전히 바뀝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얘기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가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는 사람,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됐으니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180도로 완전히 달라지는 생의 변화를 우리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가던 사람인데 붙들렸습니다. 완전히 포로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포로가 됐습니다. 이것은 자기 뜻이 아닙니다.

자기는 본래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체포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제 완전히 예수의 강권적 능력에 의하여 포로가 됐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 뜻하는 바를 우리는 몇 가지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것은 사실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꿈이 아니요, 픽션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옛날의 헬라사람들, 철학자들은 말이 많았습니다. 설명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설화도 많고 신화도 많고……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기독교는 사건적인 종교요, 역사적 종교입니다. 어느 누구의 깨달음이나, 어느 누구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건입니다. 예수 사건,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을 기초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교회요, 우리의 신앙입니다.

역사적 사건에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나의 어떤 자격을 보신 것도 아니고, 인물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친히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때부터 시작해서 내 일생 오늘까지,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 죽거나 살거나 복음 전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세 번째는 'I have no choice.'-'내게 자유가 없습니다. 나도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26:19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내게는 정말로 자유가 없습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3:8

가만히 보면 주님께서는 바울의 의견을 묻지 않으십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도대체 아무 의견도 묻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가는데, 건너가기 전에 모여 가지고 갈까 말까 회의를 했더라면 못 건너갈 뻔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 앞에 인간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을 개입하면 잘 될 것 같지만 잘못됩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를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신1:19-23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 최고인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내 의견을 물어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대로 따르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바울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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