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환우들을 위하여
영적인 질병과 육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에게 평안과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더하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소서.
질병의 고통 중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성령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통해 위로받고 새 힘을 얻게 하소서.
절망과 자살 충동, 우울증과 조울증, 악한 영의 공격, 공황장애와 온갖 정신적 질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26: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26:1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은 지 벌써 2년이나 되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간에 재판만 해도 네 번이나 한 셈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이 어찌 있을까 싶습니다.
재판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적어도 재판 맡은 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석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연유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자기의 정치적 입지와, 또 죄가 있건 없건 바울을 죽이겠다고 모의하고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 때문에 그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형편이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고 저들도 죄 없는 줄 아는데 무죄 석방을 하지 못한 채 무려 2년 동안이나 이렇게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네 번의 재판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첫 번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폭도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 폭도들 앞에서 일단 천부장을 재판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정치권으로 넘겨져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바뀌어 이제는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 앞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네 번 재판을 받는데, 그 때마다 유대사람들은 원고가 되어서 갖은 말로 나름대로 그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죄목을 뚜렷하게 대지도 못하면서 판결의 결과만을 먼저 말합니다. "바울은 죽일 사람입니다" 왜 죽여야 된다는 이유도 변변치 않습니다. 죽이기 위해서 죄목을 말하는 것이지 죄목이 있어서 죽인다는 게 아닙니다. 죽이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는 것입니다. 결론이 먼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저들은 열심히 고소를 했습니다.
또 재판장은 재판장대로 바울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심문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그는 변명할 때에 "나를 고소한 사람들이 이래서 나쁩니다. 저들이 나를 무고한 것입니다" 라든가, "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왜 나를 가두어두는 것입니까?" 라든가 하는 얘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적어도 "왜 나를 석방하지 않느냐, 죄는 없다고 하면서 왜 석방하지 못하느냐" 라는, 요새말로 하면 가장 정의로운 말입니다마는 이 말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를 줄 때마다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 또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자기변명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런 바울이 다섯 번째 재판을 받습니다. 오늘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권은 없지만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게 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26:1어떻게 생각하면 지치기도 하고, 화가 날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습니다. 끝까지 그는 온유했습니다. 다섯 번이나 재판 받으면서 다섯 번이나 같은 말로 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변명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변명 중 가장 긴 변명입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드릴 것도 계속해서 이 긴 변명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바울은 완벽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침착합니다. 온유하게, 겸손하게 인내로, 사뭇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같은 말로 자꾸 물어보면 마지막에 짜증을 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장님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눈을 뜹니다. 눈을 뜬 다음에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봅니다. "너를 눈뜨게 한 자가 누구냐? 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죄인이라던데 그가 누구냐?" 마지막에는 눈을 뜬 사람이 아주 짜증을 냅니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9:27그도 그럴 만 합니다. 같은 얘기를 자꾸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가 좋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앞서 변명할 때에 다 말했으니 기록도 있을 테고,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거기서 들으시오.
그러면 될 것 아니요? 왜 나한테 똑같은 말을 자꾸 하라는 거요?' 그렇잖아요? 수없이 이렇게 반복해서 말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참 짜증스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늙은 아버지의 질문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는데요.
82세의 노인이 52세 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시, "까마귀라니까요."
노인은 조금 뒤 또 물었다. 세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이 났다. "글쎄 까마귀라고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귀, 까마귀라고요. 그 말도 이해가 안돼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하세요?"
조금 뒤였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말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애기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같이 물었다.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번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
사랑하면 백 번을 묻든 천 번을 묻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물어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손님을 잘 대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은, 사라도 어디 가고 없고 아브라함 혼자 있는데, 나이 100세는 넘은 웬 노인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먼 길 온 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마침 혼자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싶어서 자기 나름의 손님 대접하는 특유의 인간성을 발휘하여 노인을 앉혀놓고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 좀 기다리라 하고 딴에는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해볼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잘 마련해놓았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아브라함은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이 귀한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손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오며”
그런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사이에 노인이 벌써 음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얻어먹는 주제에 적어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참아야 될 것 아니예요? 그래 "당장 누구 없느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종이 "예" 하고 달려옵니다. "이놈을 잡아 끌어내라. 이 녀석은 하나님도 모를 뿐더러 기도하는 동안에 성급히 음식을 먹었다. 예의도 없고 체면도 없고 신앙도 없는 이런 나쁜 놈은 대접할 가치가 없다. 냉큼 내쫓아라!"
그래서 그 노인이 끌려 나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아브라함아!" "예?" "너 무슨 짓을 하느냐?" "저놈이 나쁜 놈이라서 내가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절도 모르는,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을 내가 왜 대접하겠습니까?" "이놈아, 나는 저 사람 회개하기를 백 년이나 기다렸다." 아차, 하고 아브라함은 황급히 "죄송합니다" 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더구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저쪽은 맘에야 있건 없건 좌우간 듣겠다고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원수라도 좋고,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좌우간 내 말을 듣겠다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봉사 치고 밑천 안들이고 할 수 있는 봉사가 이것입니다. 들어주세요. 귀담아 들으세요.
지금 많은 사람 중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바울은 본래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사명적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여기에 무슨 구구한 감정이 달리 있을 수 있습니까? 말하라면 해야지 "왜 또 같은 말을 하라느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이것을 새로운 기회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또 하나의 선교적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실은 바울의 그 예리한 지식과 판단력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몹시도 기분 나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도 그렇고, 아그립바 왕이라는 형편없는 사람도 그렇고, 특별히 그 앞에 아내도 아니면서 아내 격으로 왕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버니게가 그렇습니다.
이 세 사람이 높은 보좌에 죽 앉아 있고, 그리고 재판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죽 있으니,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우선 도덕적으로 마땅치 않아요. 분위기가 마땅치 않아요. 요즘의 성급한 사람으로 말하면 정의감이 용납치 않습니다.
저는 한번 이렇게 상상을 해봅니다. 이 자리에 세례 요한을 세워놓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욕먹어 마땅합니다. 이것은 살로메의 얘기하고는 또 다른 것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얘기하고는 또 다릅니다. 그것보다 차원 높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런 분위기 속에 세례 요한이 있었더라면 눈을 부릅뜨고 사자소리를 토해냈을 것입니다. 있는 대로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심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정직할 뿐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자된 자기페이스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돼먹지 않았고,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내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저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2024년 4월 17일 오전 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