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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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1.

대통령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정치 지도자들이 권모술수를 행하지 않게 하소서

2.

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릇된 이념이나 선동이 아닌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소서

3.

주변 강대국들과 경제, 안보 갈등이 조속히 해결되게 하시고 한반도의 평화적 정세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행24:10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행24:10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잡혀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나는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의 갈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자 바울을 가이사랴로 후송합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만든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호송된 이후 거기에서 3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첫 번째는 벨릭스 총독에게,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이었던 베스도 총독에게,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오늘 읽은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서, 25장은 베스도에게서,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제사장이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와서 사도 바울을 고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소 조건은 모두 사도 바울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1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

총독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왜요? 문제가 생기면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면 총독 자리에서 떠나야 돼요. 그래서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엄벌에 처하는 것입니다.

2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다(5절)

유대교의 로마가 인정한 종교로서, 합법적으로 종교 활동이 허락되었으나, 로마가 허락하지 않은 종교 활동을 하면 로마법을 어긴 자가 되어 처벌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처벌하기 위하여 바울이 유대교가 아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3성전을 더럽게 하려 했다 (6절)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행24:6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성전 내에서는 모든 이방인들, 심지어 로마인조차도 성전 규례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법을 어기면 처벌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재판 받는 것을 이렇게 세세하게 3장에 걸쳐 기록했을까요? 사도 바울의 사랑에 감동하셨기 때문.

진정한 사랑은 언제 알 수 있나요? 핍박, 고난, 어려움을 당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을 저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로서는 세 번째로 하는 변명이 됩니다. 그가 체포될 때에 영문 층대에서 변명한 일이 있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변명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총독은 로마를 대신하여 사실상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하고 로마사람들에게 넘겨서 사형케 할 수는 있지만 사형에 대한 권한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 선고와 함께 곧 집행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볼 때에 지금 벨릭스 총독 앞에 섰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선 것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이렇듯 절박한 재판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인가 결단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분명히 주님의 약속을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3:11

어쩌면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자 앞에서 재판 자체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좀 당하겠고, 매도 맞겠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종국에는 로마로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구차하게 변명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내가 무엇을 전하고 있으며, 내가 왜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를 역력히 만인 앞에 증거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세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는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구차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벨릭스 앞에 잘 보여 가지고 우선 이 자리부터 모면해보겠다는, 혹은 고통을 면해보겠다는 비겁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송사한 사람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3절)"하고 길게 아첨을 하는 한심한 무리들과 대비가 됩니다.

사실은 고소한 사람들보다 피고인인 바울 쪽이 더 다급합니다. 고소하는 사람들이야 고소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피고인인 바울은 생사가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입을 열어 말씀하는 첫 마디를 보세요.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행24:10

'당신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에서 총독을 지냈고, 예루살렘에서도 총독을 지냈고, 이제 가이사랴에 있어서 이 지방을 이렇듯 오랫동안 다스렸으니 우리 종교 문제나 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합니다.' 이런 자세입니다.

구구하게 긴 설명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담대함, 이 선명함, 이 용기 있는 모습이 오히려 벨릭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공부하겠습니다마는 급기야 벨릭스는 바울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합니다.

말이 길어야 능사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담력과 용기에 있습니다. 설명이 길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이 문제입니다. 진실에 감동이 있는 것이지 긴말이나 웅변에 사람의 마음이 감동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체포당해 와 있는 한 사람의 죄수가 있습니다. 한낱 죄인의 모습으로 시퍼런 재판정에 서 있는 '피고'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감히 서슬 푸른 로마총독을 설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깊은 인상과 감명을 심어준 것으로 본문의 결론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구구하게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용기 있게, 담대하게 믿음으로 말씀했습니다.

본문에 스데반이 죽을 때처럼 '천사의 얼굴 같더라'하는 기록은 없습니다마는 바울의 모습은 태연, 온유, 담대했다는 것을 말씀의 행간에서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사실을 간단하게 말씀하려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려 합니다. 사실 자체를 설명하려 합니다. 구차하게 긴 이야기나 부탁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그는 고난을 당해도 좋습니다. 사형을 당해도 좋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내려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지금 의도하는 바는 오직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다'하는 것을 분명하게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 이 한 가지 연유로 고난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다 좋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예수 전하는 것, 이것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당하겠다, 매를 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순수하게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하여 고난 당하는 일이라면 기거이 감수하리라-이것이 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설파합니다.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때에는 선동죄로 고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있는 곳에는 으레 trouble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바로 trouble maker입니다, 어디서나 이 사람만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선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로마정부의 치안 문제, 안보 문제에 걸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런 사람은 죽여 없애야 합니다.

마치 로마정부를 생각해서 말하는 것처럼, 마치 정부의 치안문제를 염려해서 말하는 것처럼요. 그들은 지금 바울의 일을 정치 문제로 돌려서 정치적 관심으로 차 있는 벨릭스에게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가리켜 선동자라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주동자라고, 이런 사람 내버려두면 세상이 소란스러워진다고, 혁명이 일어난다고, 폭동이 생긴다고, 그러니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벨릭스를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염병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역설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밉게 보아서 전염병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이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 가루 속에 던져진 누룩과 같다고. 가루 속에 누룩이 조금만 들어가도 어느 사이에 좍 퍼져나가요. 전체를 누룩으로 만들어 나가요.

그와 같은 것이다, 복음은 누룩과 같다고 하심입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말하면 '복음은 전염병과 같다'입니다. 그렇잖아요? 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쁜 말이지마는 이건 아주 좋은 말입니다. 왜? 반드시 변화하니까.

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하니까요. 변화 안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예수 믿고 달라지지 않았다면 문제 있는 것이지요. 성격도 달라지고, 세계관도 달라지고, 심지어는 건강도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요.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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