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담임목사를 위하여
말씀의 은사를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영적인 민감함을 주사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을 내리게 하시고 목자의 가슴과 아비의 눈물로 모든 성도를 깊이 사랑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겸손의 리더십을 갖게 하소서.
목사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온전히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과 여건을 허락하여 주시고 가정에 평안을 주소서.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행23: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23:1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빌라도 법정보다 더 잔인한 법정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거짓 증인을 세워가면서까지 재판을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공의나 의가 실현되리라고는 애시 당초 기대할 수 없는 재판정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의한 재판정입니다.
또한 스데반을 재판하여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이던, 아주 무서운 재판정입니다. 의도, 진리도, 공의도 없는 물론 신앙도 없는 재판정입니다. 여기서 재판을 어떻게 받으며, 또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보나마나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서서 사도 바울은 지금 담대하게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미 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용기 있게, 담대하게, 할 말은 해야겠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기회인 귀한 시간입니다.
그는 공회에서 간결하게 자기변명을 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범사에, 모든 일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는 양심을 따라 하고, 어떤 때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기도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양심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히브리인의 양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경건적 신앙 위에 선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도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선한 양심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양심이 타락하고, 양심이 변질되고, 화인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빗나가면 모든 일이 다 빗나갑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양심이 빗나가 있는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희생하고,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어떤 학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요, 무슨 철학의 문제나 어떤 지식이나 사상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양심을 따라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입니다. 결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양심을 따라" - 이 말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양심의 자유를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양심이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하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또 하나는 기쁜 마음으로.
어린이들에게 "양심이 뭐냐?"하고 물으면, 한참 생각하다가 "거짓말하려고 할 때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 못된 짓 한 다음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면이지요.
그러나 진짜 양심은 좋은 일 하려고 할 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에 아주 벅찬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보다 높은 차원의 양심입니다. 여기에는 억압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에 눌려서 심판을 두려워하며 행하는 일이 있고, 선한 양심에 끌려서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후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끌려서, 죄책에 끌려서, 저주 의식에 매여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이렇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직업적으로 돈 벌려고 한 것도 아니고, 강제로 일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깨끗한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겼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적 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이것은 신앙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가 나에게 계시하였고, 그가 나를 부르셨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인도하셨고, 내가 아는 율법, 그 진리를 따라서 내가 행했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신앙적 의지 안에서 내가 오늘까지 수고했노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담담합니다. 아주 깨끗한 고백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분노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당장에 저 놈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행23:2그가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바울을 죄인으로 잡아놓고 있습니다. 정죄 하려고 합니다.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서 다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잘못이 노출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바울의 당돌함에 대해서 그는 벌써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자신은 그 옛날 스데반을 정죄하고,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천하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죄인으로 심판을 하고, 출교하고, 끌어내서 돌로 친 것입니다.
무릇 죄인은 죽을 때에 비참하게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를 갈면서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오히려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얼굴에 광채를 띠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저렇게 죽을 수가 있나,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가 있느냐- 심리적으로 바울이 그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설명을 합니다. 사실이 그런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가책으로 인해 바울은 더 악해져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말살해버리고자 거친 행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제사장이 부드럽지 못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니까, 당장에 "그 입을 치라(2절)"고 명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고의 죄가 드러나기 전에는 형벌을 주지 못하도록 율법에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신25:1-3). 이때 바울은 아직 죄가 발견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고소되지도 아니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한 것은 분명히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잘 지켜야 할 대제사장이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율법에 어긋난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죄도 정하지 않고,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먼저 입부터 치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또 바울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한 것이 어째서 죄가 됩니까?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바울이 벌벌 떨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든지, 지난날에 잘못했다고 하든지, 어쨌든 죄인된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너무 당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은 양심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합니다. 양심을 경건한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도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씀이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린 것입니다.
'저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생각합니다. 참람하다 여깁니다. 바울의 그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처럼 들린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렇게도 전혀 다르게, 참람한 비방을 하는 죄로 들려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서 정말로 잘못한 바가 없다면, 그를 죄인이라고 끌어다놓고, 죄인을 만들려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반대로 이쪽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피고의 입장에서 재판 받고 있는 사람이 '내가 죄가 없노라'한다면 그를 끌어온 재판장이 그 순간 당장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재판한 빌라도는 그 자신이 죄인입니다.
결국은 자기의 죄인 됨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없는 바울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하는 선언을 들으면서 제사장 자기의 죄인 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면적으로 제사장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양심적인 제사장을 심판하는 선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발작을 하게 됩니다. 분노한 나머지 그 입을 치라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을 많이 봅니다.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앉은 자들이 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일은 옛날에도 지금처럼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재판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확실한 이유를 대기 전에 자기감정에 따라 피고를 구타한다면 이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인권 침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무리 법정에 선 초라한 사람일지라도 그와 같은 불법을 가만 둘 수 없었습니다. 항변하는 것이 권리는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여기 굽신, 여기 굽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반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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