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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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1.

국군 장병들에게 건강한 육체와 마음을 주셔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인도하시고 모든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장병들을 평안하게 지켜 주소서.

2.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장병들이 영적 광야인 군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고 이들을 통해 군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3.

군 선교를 위해 힘쓰는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영혼 사랑의 열정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강건함을 허락하시고 군인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이 구원받는 열매가 풍성하게 하소서.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22:22-2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22:22-23

이 말은 어떤 말입니까?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22:21

유대인들을 바울의 말을 듣다가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더 이상 듣지 못하고 흥분하게 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말자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을 향하여 날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만큼은 견딜 수 없이 싫어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서 파손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서로 미워하는 사람 둘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뱃머리에 탔고, 하나는 배 뒤쪽에 탔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습니다. 그 때에 배 뒤쪽에 앉은 사람이 선장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장님. 이 배가 가라앉을 때에 앞에부터 가라앉습니까, 뒤에부터 가라앉습니까?" "앞에부터 가라앉습니다." "됐습니다. 저 놈 죽는 것을 보고 내가 죽으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다 보면 이 지경에 이릅니다. 미운 마음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놈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할 만큼 미련스러워집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지금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그런 악랄한 마음에서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들은 왜 바울을 없애고자 할까요? 일찍이 예수님을 그렇게 했듯이 오늘에 와서는 바울도 왜 없애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야고보를 죽이고, 이제 다시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과 바울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유대사람으로서 동질적인 게 많습니다. 같은 율법을 숭상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같은 선민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귀중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이방사람을 유대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통 못마땅한 것입니다.

사실상 유대사람은 이방사람을 별로 미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문으로 연구한 사상가들에 의하면 유대사람들이 쓴 많은 문학작품 중에 이방사람에 대한 미움을 주제로 다룬 것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독일의 나치당들이 무려 육백만의 유대사람을 죽였는데도 그들은 독일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또 유대사람들은 바벨론 포로로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들은 이방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곤욕을 치렀습니다. 수난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이나 그들의 사상에 이방사람들을 미워하는 구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을 멀리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십니다. 이런 면에 그들은 아주 여유가 있습니다. 장사도 같이 하고, 거래도 같이 합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구원 문제에서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우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집이 있습니다. 이 선민사상만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선민으로서 이방사람을 불쌍히 여겨 함께 사는 것이지, 이방사람이 선민과 같다는 얘기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네를 이방사람 취급하는 것은 절대로 참지 못합니다 ― 이것이 유대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구전입니다. 어떤 사람이 풀을 베는 낫을 빌리러 옆집에 갔습니다. "낫 좀 빌려주세요" 했는데 그 집에서는 "못 빌려주겠는데" 합니다. 분명히 낫이 있는데도 안 빌려주는 것입니다. 낫을 빌리러 갔던 사람은 당연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낫을 빌려주지 않았던 그 사람이 며칠 뒤에 이 사람한테 와서 부탁을 합니다. "일전에 낫을 못 빌려준 것은 미안하오. 그렇더라도 나는 지금 말이 필요하니 말 좀 빌려주시오." 이럴 때, "내가 낫을 빌리러 갔을 때에는 안 빌려주었으면서 나한테는 말을 빌려달라고 해? 못 빌려줘" 한다면 이것은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장군, 멍군한 것이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낫을 안 빌려줬으니 나도 말을 못 빌려준다 ― 당연한 것 같지만 이것은 복수를 한 것입니다. 이빨에 이빨로 복수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을 빌려주겠소"하고 내줍니다. 이것은 미움입니다. 사랑이 아니예요. 이것이 선민임을 자부하는 저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유대사람들의 고집입니다.

사람들이 다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 어떻습니까? 알아들을 것 같습니까? 네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봐라, 나는 이 정도 수준에서 이런 말 듣고 너를 미워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와 같지 않다. 수준이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빌려줄 것이다

여러분, 말을 빌려 가지고 간 사람이 좋아해야 합니까, 불쾌해야 합니까? 수준이 낮은 사람은 좋아할 거예요 그러나 알고 보면 말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굉장한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빌려 준다는 교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분 나쁜 것입니다. 자기는 수준이 높은 사람이고, 너는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네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핍박해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선민이니까, 우리는 이 수준에 있으니까 ― 이것이 미움이예요.

그러니까 이방인을 자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동등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릇 더불어 행복할 줄 하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아지는 것을 축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우리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와 수준이 같아질 때에는 그것을 못 참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어요. 어떤 아가씨가 어디 가서 아주 마음에 드는 옷을 사 입었어요. 그런데 그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면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아요. 왜요? 기분 나빠 서지요. 나는 특별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영 못 참은 거예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이나 다른 백인들 사회에 가서 보면 우리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에 어렵게 생활하면 잘 도와줍니다. 그러면 이 민족은 인도주의적이고 인심 좋은가보다 하지요? 천만에요. 그들과 비슷해지기 시작하면 어림없어요.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 못 참아요. 거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고로 참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 빵 하나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나와 같아지는 것, 오히려 나보다 높아지는 것, 이것을 용납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해요. 더불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명품 장사를 하는 업체들을 보면 별것도 아닌데 아주 비싸게 팝니다. 루이비통의 상술 - 일부러 적게 생산해서 VIP 고객 외에는 사기가 힘들게 만듭니다. 왜요? 나는 너와 다르다. 차별화 하고 싶은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값이 싸야 팔릴 것 같지만 그것은 서민의 생각입니다.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집에 있고, 한 아들은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아버지 유산을 받아 가지고 허랑방탕하다가 거지가 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며 반가이 맞이해 주지만 형은 싫어합니다. 내가 이 집에서 이렇게 수고하면서 아들의 본분을 지키느라 고생했는데, 저렇게 방탕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들이면 저는 종이고, 내가 선민이라면 저는 이방인이지, 어떻게 내가 저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느냐, 그게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율법을 지킵니다. 십계명을 알고, 또 천사가 계시해주었다는 613가지 계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엔 이렇게 해야 되고, 이것은 먹지 말아야 되고, 이것은 먹어야 되고…… 많은 계율을 지키느라 애쓰고, 그것으로 인해 유대인의 긍지를 지니고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깨끗하게 정결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람된 높은 위상을 지니고 살고, 구원받는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것을 보니까 이방사람들 ― 개처럼 살고, 돼지처럼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고, 짐승처럼 형편없이 살던 사람들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하며 웃습니다만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이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당신도 천당 갈 것이고 저 사람도 천당 갈 것인데, 그래 천당 가서도 싸우겠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당도 분명히 윗자리, 아랫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는 저 사람하고는 천당 가서도 안 만나겠다는 거예요. 이런 마음이 바로 유대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것을 전하는 바울, 저 사람을 죽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유대사람이 이방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지적을 저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성경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 ― 저들이 듣지 아니하리라, 그런고로 너는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인즉, 유대사람들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강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너는 멀리 이방인에게로 가라'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유대사람이 이방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거예요.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교만하다는 거예요. 이 지적이, 이 비판이 저들의 마음에 못마땅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과 이방사람이 같다고만 해도 기분이 나쁜데, 이방사람이 더 낫고, 이스라엘사람은 복음에 관한 한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저들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찔림을 받을 때에 회개하지 않고, 반항하면서 완악해집니다. 더 마음이 굳어집니다.

게다가 이방사람과 자기네를 비교하는 논리, 그것이 더욱 더 마음에 안 들었어요. 사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충고할 때에도 형과 동생을 따로 놓고 충고하면 잘 들어요. 그러나 형 앞에서 동생 나무라고, 동생 보는 데서 형을 때리면 형제가 다 못 마땅해 합니다. 기분이 나쁜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방사람들이 있는 데서, 더구나 로마사람 있는 데서 유대사람은 완악하다, 차라리 이방사람이 낫다는 비판을 하면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제는 무슨 말도 필요 없어요.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씀마다 그를 꼭 죽일 수밖에 없는 소리로 들려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늑대가 숲 속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조그마한 새끼 양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오라, 저것을 잡아 먹어야겠다'라고 늑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늑대가 체면이 있어서인지 그냥 잡아먹을 수는 없고 해서 양에게 말을 겁니다. 시비를 벌이는 것이지요.

"너는 어째서 내가 먹을 물을 흐리고 다니느냐? 물을 흐리는 너같이 나쁜 놈은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린양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늑대님, 당신은 냇물 상류에서 마셨고, 저는 하류에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늑대님이 마시는 물을 흐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말이 됩니다. 그러나 늑대는 이에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네가 일 년 전에 나에 대해서 못된 소문을 퍼뜨린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 오늘 너를 잡아먹겠다." 그랬더니 양은 "일 년 전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라고 합니다. 하지만 늑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나를 못됐다고 헐뜯고 다녔다. 그런고로 너를 잡아먹겠다." 이것이 무슨 소립니까? 잡아먹기로 작심했으니까 이젠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생각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이제는 무슨 말도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변명도, 어떠한 논리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없애버림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참으로 엄청납니다. 다시 말하면 더 큰 죄를 지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 시간에 바울이 말씀하는 복음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것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저 놈이 살아 있으면 내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것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주관적이요, 결국은 의를 짓밟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메시아가 어찌 이방인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그들은 이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자기들 식으로 편협하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만, 우리 교파만, 우리끼리만” 이런 모습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족속, 모든 열방,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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