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 지역 사회의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도 충만하게 하시고 모든 예배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복과 부흥이 있게 하소서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소서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22:6-9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22:6-7여기서 오정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밤에 잠을 자는데, 자정에 꿈을 꾸었는데,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희미한 소리가 됩니다. 아무래도 밤중이라면 몽롱한 가운데 받은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정쯤 되어 - 정오에, 밝은 대낮에 바로 이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잠자다가, 꿈꾸다가, 몽롱한 가운데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확인했다는 말씀까지 있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22:8주님 누구이시니이까 - 당신 누구요? 라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신 누구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 이렇게 확인을 하고 난 다음에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7절)" 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아 - 개인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예수를 박해한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아마도 한 마디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말조심하세요. 내가 언제 당신을 박해했습니까? 내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따라가서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까? 나는 당신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그렇게 대들지 못했습니다. 왜요? 사실이니까요.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요.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임은 몰랐었는데 이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박해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훼방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 예수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심지어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 여기서 사도 바울은 완전히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계속되는 간증을 봅시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22:9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빛은 보았는데도 바울이 들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극히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극히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에는 두 가지 부르심이 있습니다. 공동체적 부르심과 개인적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한 교회의 성도로서 공동체적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전 세계에 복음을 들고 함께 나가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우리들을 한 교회의 성도로 묶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담임 목사 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성도 모두를 포함한 전체 공동체로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적 부름의 한 예입니다. 오순절 날 하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을 보내신 것도 그곳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을 공동체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나는 가서 네 족속, 네 민족을 해방시켜라”
에스겔도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온 자들 중에 있었는데, 그발 강가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구름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광체를 보았습니다.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계시,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적으로 부르시고, 개인적으로도 부르십니다. 개인적인 부르심은 주님과 당사자만의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만 아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22:9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고난도, 어떤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런 개인적 부르심,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들려주셨던 개인적인 음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바울만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생애를 결정하였습니다. 바울의 평생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이 음성이 있었기 때문에 도적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시장의 위험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위험과 굶주림과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기막힌 삶의 여정에서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음성 때문에 그는 길거리에서도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저도 그런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저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적으로 만나 주시고 개인적으로도 만나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받은 부르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해라.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살아라”하신 부르심이 있습니까? 그 부르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부르심이 있는 사람은 보따리를 싸서 아프리카도 가고 어디든 갑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분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헉슬리라고 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참 점잖은데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젊은 조수는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헉슬리 교수가 볼 때에 조수가 사람은 시원치 않은데 예수 믿는 데는 열심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주일날 아침에 조수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자네, 오늘도 교회에 갈 건가?" "예, 가야지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 좀 해보게나." "제가 교수님께 설명드릴 만큼 알고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설명해 드릴만할 주제가 못됩니다." "뭐, 거창하게 복잡하게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야. 예수를 믿어서 자네한테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왜 자네가 열심을 내야 하는지, 그것만 말하라는 거야." "정 그러시다면 제가 말씀드리지요. 저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성경도 다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습니다……"라며 조수는 조용조용히 자기 나름대로 설명을 했습니다.
진실하게, 경건하게, 이래서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설명하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조수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전에는 내가 이러저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서 이렇듯 달라졌습니다.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헉슬리 교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네가 경험한 것을 나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도 예수 믿을 수 있을 텐데," 그렇습니다.
간증은 잘만 하면 전도하는 데는 물론이고 믿음이 약한 자를 돕는 데도 큰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좋은 간증은 몇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즉 믿기 전의 자기소개, 믿게 된 과정, 그 후의 변화입니다.
문제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운명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그가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당대 최고의 지식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도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오직 예수,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그리하여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 앞에서도 생명을 걸고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 같이 생명을 살리는 복된 일에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