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다음 세대를 위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고 새벽이슬과 같은 주의 용사들로 세워지게 하시며 젊은이들이 땀 흘려 수고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게 하소서.
음란하고 혼탁한 문화, 각종 중독으로부터 저들의 생각과 육신을 지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해답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기독교 가치로 세워진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방해하려는 모든 악한 세력의 행보가 무너지게 하소서.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21:27-3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21:31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27절)"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시아란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사도 바울이 핍박받았던 얘기를 살펴왔습니다. 가만히 보면 로마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핍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은 거의가 유대사람들로부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했습니다. 회당장이 핍박을 하고, 장로들이 핍박을 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했습니다.
왜 핍박을 했느냐? 그 문제는 끝끝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습니다마는 사도행전의 맨 끝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아무튼 저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것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신앙이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아주 꽉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무효랍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고 맙니다.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공부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다 끝내기 전에 제 풀에 죽기도 합니다. 또 사업하는 데에도 시기와 질투가 작용을 하면 성공하는 사업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강한 경쟁심, 시기 질투, 이것이 문제입니다.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삽니다' 하는 생각은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런데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그가 죽어야 내가 산다'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를 죽여야 한다 ― 사실은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헤겔의 변증입니다. 유물사관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아내가 기뻐야 나도 기쁘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꼭 상대방의 기를 죽여 놓아야 자기가 사는 줄 알아요. 못된 성미지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나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남을 꺾고, 농담을 해도 핀잔을 주어서 남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놓고, 저는 좋아합니다. 남을 낮춰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압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철학입니까? 이런 사람은 중생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비뚤어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매일반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살겠다'하는 마음보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자기네가 거침없이 마음대로 지배해왔습니다. 회당장도 되고, 장로도 되고, 교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딱 나타나 외치니까 백성들이 다 그리로 갑니다. 그러니 자기네들은 뭐가 됩니까?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귀들이 길을 가는 이 성자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성자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눈앞에 보여줘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갖가지 방법으로 시험을 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성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마귀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풀이 죽어 있는데, 대장 마귀가 나섰습니다. "저리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 그리고 성자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소린지 딱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성자의 얼굴이 확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마귀들이 대장에게 물어봅니다. "도대체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간단하지. '당신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소'라고 했지." 바로 그 한마디에 성자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입니다.
동생이 주교가 되었으면 "참 잘됐구나. 할렐루야!"해야지 안색이 변하다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가 좁은 마음을 깨뜨리고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격려하고 형제가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시기 질투는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작동한다 싶으면 그 뒤에 사단이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시험하는 데는 이 시기 질투가 마지막 시험입니다.
사실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질투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바울은 꼭 죽어야 된다, 바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기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없어야 자기네가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바울을 반드시 죽여야 할 역사적인, 혹은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하니까 이방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온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그 중의 대표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은 지성인입니다.
바울이 갈릴리의 어부라든가, 혹은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말할 때에 "그 사람, 정신나간 사람이야. 무식해서 그래"하고 밀어붙이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철학자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대학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심지어는 아그립바 왕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바울아, 너의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 정도로 그는 세상이 알아주는 지식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느 갈릴리 어부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체계적이요, 변증적이요, 확실합니다. 당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그를 없애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를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유독 사도 바울만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러나 동족에게서 핍박을 받으니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울의 죄목이 무엇입니까?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행21:28첫째는 반 유대교적이요, 반 율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인데 -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과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 자리에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혔다,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는 성전의 거룩함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하여 바울같은 사람은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성전에 대해서,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데 있어서 아주 보수적이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사실은 아닌데)"
행21:29오해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 일이 없습니다.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이방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에도 같이 들어간 줄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오해가 왜 문제가 됩니까?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오해가 있더라도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그치겠지만, 악의에 찬 사람이 뒤에서 사건을 만들고 있으면 일이 이렇게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소동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여론에 의해서 재판하고, 군중심리에 의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네가 죽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죽인 것처럼 일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인민의 뜻이 그렇고 국민의 뜻이 그렇다, 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개 독재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인데도 백성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군중심리를 자극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공작'하여 소위 '인민재판' 같은 것을 해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 말이 없습니다. 바로 몇 년 전에 자신이 그 짓을 했으니까요.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은 조용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참으로 정확하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죽는구나.' 성경을 보니 바울이 아무 말씀도 안 했습니다. 어쨌든 몇 년 전에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 방법으로 이제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4년 3월 2일 오전 6: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