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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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과 다문화 가정을 위하여

1.

이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며 이들이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 열방의 선교사로 나아가게 하소서.

2.

다문화 가정을 축복하사 불신, 이혼, 폭력 등의 아픔을 겪지 않게 하시고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성장하게 하소서.

3.

언어와 문화, 생활 습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로하사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소서.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행21:22-26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21:22-24

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람이 네 사람이 있는데 이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만일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유대사람이 되려고 할 때에는 회개의 뜻으로 결례 기간을 가지는데, 최소한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무릅니다. 그리고 30일 간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깎고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 때 드리는 예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한 마리, 속죄 제물로 어린 암양 한 마리, 화목 제물로 수양 한 마리, 그리고 그에 따르는 소제물과 전제물이 필요했는데,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난한 서원자를 대신하여 부자들이 이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더러 바로 그 예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오해가 풀어질 것 같고, 당신을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될 것 같소'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 없으나, 일단 잘못한 것으로 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롭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은혜될 것이라고 하기에 바울은 양보합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생활 문제, 의식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죄인이 되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2, 23)"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참예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는 이만한 누명쯤 쓰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엄청난 타협을 합니다. 그러나 타협이기보다는 양보입니다. 양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충성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고, 아무쪼록 교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이 정도 양보해야 된다면 양보하지요'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타협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오해를 푸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여러분, 당장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차라리 누명을 쓰세요. 억울함을 당하세요. 그리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백일하에 공의가, 진리가, 바른 일이 높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삶의 자세입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행21:25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인들에 대하여 결의했던 사항을 바울에게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방인 성도들의 자유에 대해 열심이었던 바울에게 이 사항들을 상기시키고 있는 목적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지켜야 할 것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결정한 사항 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행21:26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제시한 전략에 동의하고 그 이튿날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울은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 행동은 전략입니까? 신앙입니까? 그것은 전략이 아니고 신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환난과 결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두려워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예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은 그 쪽을 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9:19-22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철학입니다. 그의 삶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형식이 사도 바울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알 수만 있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롬9:1-5

이렇게까지 말한 사람이 무엇이 무서워서 피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고 구원할 수만 있다면, 머리 깎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녀가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교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략이었든지 신앙이었든지 그 결과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즉 소요를 막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즉 예수는 독하게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과 타협하며 믿지 마십시오. 세상과 타협하면 편합니다. 타협만 하면 무엇이든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한 사람은 얻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비참해 집니다.

반면에 예수를 독하게 믿는 사람은 다름 사람들로부터 비판받기 쉽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편협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왜 꼭 그렇게 촌스럽게 믿어야 되느냐는 핀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으려면 독하게 믿으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성수를 하십시오. 그렇게 독하게 예수를 믿으십시오. 십일조를 하십시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녀 교육 역시 신앙 중심으로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얻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2024년 2월 29일 오전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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