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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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동성애를 두고 기도합니다.

1.

동성애를 옹호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문화적 기류가 끊어지게 하시고 이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거짓과 궤변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2.

미디어를 통해 미화되는 동성애의 실체가 드러나게 하시고 다음 세대들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도록 가정과 교회가 더욱 깨어 가르치며 기도하게 하소서.

3.

한국교회가 성령 안에 하나 되어 동성애와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막아내게 하시고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는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21:5-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행21:5-6

이 여러 날(1주일)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 그들과의 만남은 일주일 간의 짧은 교제였습니다. 피차 서로 몰랐던 관계였지만 헤어질 때의 모습은 밀라도에서의 작별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정이 들었던지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는데 헤어지기 전에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독교는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종교로 비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두로의 성도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헤어졌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만남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까?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만나면서도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낍니다. 언제나 홀로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군중 속의 고독,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속을 터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내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내가 기쁘게 희생을 하고 손해를 볼 수 있는 친구도 우정도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누군가 이사를 왔습니다. 떡을 나누고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아마 그 두 사람의 나이가 같거나 직장이 비슷하다면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면 더 친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같은 교회에 다닌다면 어떤 사람보다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헤어질 때는 어떻게 합니까? 참 좋은 이웃이었었는데 잘 가라며 커피 한 잔 정도 대접하고 헤어집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이 정도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서로 거리를 두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생활 구조입니다.

그런 일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만 드리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의 교제도 어느 정도 선을 긋고 하는 것입니다. 모임도 어느 정도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범위에서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만남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만나도 헤어져도 잊을 수 있는 관계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약간 섭섭한 정도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만남과 관계는 떠나도 잊을 수 없는 관계요, 부탁하지 않아도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내 심장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관계요, 영적이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정말 진실된 관계라면 자신이 희생하고 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희생하고 손해 보는 것이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살고 있습니다. 시간을 따지고 돈을 따지며 만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만남은 오히려 더 공허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만남이 긴 만남이 아닐지라도, 우리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만남이 바울과 같은 축복된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을 교제했지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관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 영과 영이 통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는 만남을 통하여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적인 동기로 보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을 보면 밀레도에서 뿐만 아니라 두로에서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행21:7-8

이제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형제들을 만나고 또 하룻밤을 잡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나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게 행동합니다. 사람들도 쉽게 만나고, 하는 일도 간단합니다. 그 다음날 바울은 다시 가이사랴로 갑니다. 거기에서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하나였던 빌립 집사를 만나 그의 집에 유합니다. 아주 간단한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해 보면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과 빌립은 20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행8장을 보면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 했던 살기등등했던 그때에 사도 바울은 이 빌립과 아는 처지였습니다.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 대 핍박이 일어나 사도 외에는 다 흩어지게 되었을 때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지 못하고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 곳에서 전도를 했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나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때 빌립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던 것을 그만두고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곳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그와 함께 이사야서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메시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례를 베풀어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과 빌립이 다시 만났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고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건들을 겪었고, 이제 그는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빌립 집사의 집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을까요?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그들은 밤이 지나도록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한 후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다고,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라고, 아마 그들이 하는 말마다 ‘내가 했다’는 말보다는 ‘주님이 하셨다’는 말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빌립에게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이 네 명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21:9

그 딸들은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집에는 많은 은혜자들이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날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21:10-12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계시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밀레도에서 같은 예언을 들었을 때,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두로와 가이사랴에서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자주 반복적으로 이런 예언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성령께서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누가 했습니까?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성령님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겪을 일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왜 반복적으로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너는 환난과 핍박을 겪게 될 것이다. 네가 준비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가 마셔야 됩니까?”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오직 십자가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내가 겪어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순간에 결정적으로 “하나님, 결심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생각하다가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모두 신사 참배를 했는데, 왜 나만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 당시 유명했던 많은 목사들이 변절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변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양 떼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죽으면 양 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등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기철 목사님이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너는 죄수로 살아야 된다. 바울아, 너는 평생 이제부터 네 주소는 죄인이다. 자유도 제한되며, 활동도 제한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죄수가 안되고 다른 데 가서 전도하면 안되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게 아닙니다. 그가 죄수로 살기 위해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죄수가 되어야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죄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주어진 숙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에게 주어진 숙제도 역시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 제가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왜 제가 예루살렘에서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왜 제가 감옥에 가야 합니까? 왜 제가 환난과 결박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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