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과 다문화 가정을 위하여
이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며 이들이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 열방의 선교사로 나아가게 하소서.
다문화 가정을 축복하사 불신, 이혼, 폭력 등의 아픔을 겪지 않게 하시고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성장하게 하소서.
언어와 문화, 생활 습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로하사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소서.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행19:33-3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행19:33-34사도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성공에 힘입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상 장사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선동을 했습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행19:25-27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사람들은 분노에 떨게 되었고, 순식간에 온 성이 요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군중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왜 모였는지 모르고 떠드는 것입니다. 떠드니까 떠드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외아들을 군대에 내보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어머니는 문맹이라 편지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 멀끔하게 생긴 청년을 붙들고, "이 편지 좀 읽어주오. 내 아들에게서 온 거라오" 하고 부탁했더니 그 청년이 편지를 펴들고는 보는 척하더니 자꾸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생각에 '아들이 죽었나? 무슨 어려움을 당했나?' 싶어 어머니도 자꾸 웁니다. 청년도 자꾸 웁니다. 지나가는 사람도 그 옆에 멈춰서서 웁니다. 몇 사람이 울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왜들 웁니까?"하고 물어봤더니 그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사연을 털어놓는데, 부모가 공부하라고 할 때에 공부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읽으려고 하니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 말씀 안들은 것이 생각나서 지금 회개하느라고 울었답니다. 병사의 어머니는 편지 내용도 모르고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울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부터는 울어야 되는 줄 알고, 우는 장소인 줄 알고 울었답니다.
원래 군중이라는 것이 그런 데가 있습니다. 열심히 떠들고 했지만 왜 모였는지, 왜 떠들었는지, 자신들도 몰랐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때 유대인들이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말을 잘하는 알렉산더를 내세워 바울 일행을 비판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군중 앞에서 이야기하려는 순간, 에베소 사람들은 다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들은 알렉산더가 유대인인줄 알고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소리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를 한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2년간의 두란노 서원 사역이 그 도시 전체의 뿌리를 흔들 만큼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만 명이 모이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연 우리 교회가 세상의 뿌리를 뒤흔들만한 영적 영향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몇 년 다녔느냐, 집사냐, 권사냐, 장로냐, 목사냐가 하는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가 얼마만큼 영향력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많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아도 세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이 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두 시간동안이나 그렇게 흥분하고 난리를 칠만큼 그 사회를 흔들어 놓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영적 영향력입니다. 영적인 힘입니다.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한 문화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영적 영향력인 것입니다.
한편 우상 제조업에 종사하던 자들이 그렇게 소란을 떨었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나팔소리가 힘이 없었더라면 그들도 잠잠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어야 기독교 답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 주변은 너무 조용합니다. 이것이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지금도 능력이 있습니다. 에베소의 부흥이 이곳에 다시 일어나도록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시대마다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방법에 달랐습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가 온다하면 아이들의 울음이 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산골 외딴 마을 먹을 것이 궁해진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서 민가로 내려왔는데, 아이가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얘, 호랑이가 왔다. 더 울었습니다. 그러자 곶감이다 하니 울음을 뚝 그쳤답니다.
호랑이의 생각?
사자가 트집거리를 찾아 밀림 속을 으스대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원숭이를 낚아채선 물었습니다. "누가 밀림의 왕이냐?" "오 힘센 사자님, 당신이죠." 원숭이가 대답했습니다.
사자는 다음에 곰을 잡아채 물었습니다. "누가 밀림의 대장이냐?"
"오 힘센 사자님, 당신이죠." 곰이 대답했습니다.
다음에 사자는 코끼리를 만나 물었습니다. "누가 밀림의 대장이지?" 코끼리는 사자를 코로 감아쥐더니 빙빙 돌려 나무에 집어 던졌고, 사자는 뼈가 부러져 피를 흘렸습니다. 사자가 힘없이 일어나서 말하길, "정답을 모르면 몰랐지 왜 그렇게 난폭하게 구냐!"
시대가 바뀌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을 당시에는 순사가 온다 하면 울던 아이의 울음도 뚝 그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선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던 순사, 우는 아이의 울음조차도 그치게 했던 순사, 8. 15 해방이 되니까 하나도 안 무섭더래요. 오히려 순사가 조선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무장 해제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마귀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사실이지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마귀는 두려운 존재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눈꼽만치도 의심치 않고 다 믿는 믿음의 사람. 마귀가 의심을 넣으려다가 실패한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마귀는 장군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 큰 권세를 가진 자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에 굳게 선 믿음의 사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속임수의 명수요.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실상을 감추고 변장하는 변장술의 원수입니다. 마귀가 비록 사자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무장 해제된 사자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에 무장 해제된 사자입니다.
무장 해제된 일본 순사가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무장 해제된 사자는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이기면 승리자가 되는 것이요. 지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람선을 탄 구경꾼이 아니요 전투함에 승선한 군인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22024년 2월 1일 오전 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