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과 다문화 가정을 위하여
이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며 이들이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 열방의 선교사로 나아가게 하소서.
다문화 가정을 축복하사 불신, 이혼, 폭력 등의 아픔을 겪지 않게 하시고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성장하게 하소서.
언어와 문화, 생활 습관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로하사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소서.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17:32-3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17:32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들을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일부는 조롱하였고, 일부는 더 듣고 결정하겠다고 보류하였으며, 극소수는 믿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조롱했던 것은 부활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면 죽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승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 오셔서 무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통일교가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그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죽은 것을 보면 그는 인간이고 실패자였다고 공격합니다.
그런 유혹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사실을 여러분도 믿고 있고 저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식한 사람들입니까? 합리적인 사고를 못할 만큼 공부를 안 했고, 세상에서의 인생 경험도 없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고 알 만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게 된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스러운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예수님으로 오셨고,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었을 때, 놀랍게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떠나갔고,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며, 죄 사함을 받은 기쁨과 구원의 감격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다양한 태도 중의 또 한 가지는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라고 한 반응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더 들어 보기는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세상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고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철학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3-2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덴에서 펼쳐졌던 바울의 선교 사역은 소수의 회심자만을 얻었습니다. 이는 아덴 사람들의 많은 지식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만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따라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듣고도 무시하거나 따르기를 유보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당시 아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들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택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17:33-34바울의 설교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롱으로 혹은 공손하게 거절하며 넘겨버렸지만, 말씀을 듣고 믿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몇 몇 사람만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결과가 우리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 전파에 있어서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난 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나 베뢰아에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였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더불어 논쟁을 하면서 철학적, 논리적, 신학적인 접근을 통해 설교한 결과 몇몇 사람밖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를 깨닫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설교를 그의 모든 설교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요?
(행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미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더라
아덴에서의 사역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바울의 목표가 신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고, 기술적으로도 헬라 철학자들의 문화에 상황화한 설교를 전하려 한 것이였다면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1세기의 하버드 격으로 보이는 곳에서 학식있는 지성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두었다고 한다면 실패입니다. 왜? 단지 몇 사람만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철학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는 단순 명료하게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전하면 됩니다. 신앙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서대문에서 사역하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철학 교수 한 분이 나오셨는데 목사님께서는 그 분을 변화시켜 보려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위 철학적으로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목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목사님, 저는 철학의 초보적인 이론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목사님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셨고, 그 후 교수님은 변화되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특별히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지식으로 그를 변화시켜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보다 뛰어난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에 감동되어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무장한 다음에 세상적인 학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알고 난 뒤에 그 기반 위에서 세상 공부도 하고 신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주의 종들이 오직 말씀으로, 우리 성령으로 전했을 때 큰 부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나 철학, 조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전할 때 기도 많이 하고 성령 충만 받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그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철학적, 신학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아덴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논쟁만 일어났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큰 부흥을 일으켰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아덴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몇 사람 밖에 전도하지 못하고 쫓기다시피 고린도로 내려갔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나가면 “예수 믿으세요”라는 한 마디 말로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2024년 1월 4일 오전 6: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