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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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환우들을 위하여

1.

영적인 질병과 육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에게 평안과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더하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소서.

2.

질병의 고통 중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성령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통해 위로받고 새 힘을 얻게 하소서.

3.

절망과 자살 충동, 우울증과 조울증, 악한 영의 공격, 공황장애와 온갖 정신적 질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17:18-2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베뢰아에서 일어난 소동을 피하여 바울은 아덴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아덴은 저 유명한 헬라 문화를 꽃 피우게 했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비록 옛날에 비해 그 영화가 시들기는 했지만 헬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 긍지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며칠 동안 쉬며 디모데와 실라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 시가를 구경하다가 우상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그 당시 내로라하던 철학자들을 상대로 겁 없이 종교를 논하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17:18

그 당시 아덴 사람들은 매우 철학적이었습니다. 특히 두 철학 학파가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에피쿠로스 학파이고 또 하나는 스토아 학파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무신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인생 최고의 목적을 쾌락과 행복의 추구로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을 인간과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범신론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부류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변론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매우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변론에는 그들의 철학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신관과 인생관과 역사관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가만히 들어보니 바울이 이상한 이론을 전개하는데, 그것이 그들 생각으로는 말쟁이 같기도 하고, 이방의 신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해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8절 앞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라"

행17:18

그 두 가지란 바로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것과 몸의 부활을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했겠습니까? 그 분이 사람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관과 역사관으로 볼 때, 이러한 얘기는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얘기였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예수가 하나님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이상한데,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까? 도저히 그들의 철학과 신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말쟁이라고 했고, 또 그와 격렬한 논쟁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복음은 세상의 철학과 종교와 견해를 전혀 달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은 우리가 자기들과 비슷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말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 그래야 서로 좀 비슷하지 않냐? 이것이 세상의 철학과 세상 종교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서로 비슷해지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착한 일을 하자. 좋은 일을 하자, 휴머니즘을 갖자. 이런 쪽으로 치우치도록 기독교를 유도 합니다. 또 기독교가 그렇게 되기를 강요합니다.

기독교는 휴머니즘이다. 기독교는 선을 행하는 종교다. 기독교는 사회 발전을 위해서 유익한 종교다. 이 정도에서 기독교를 얘기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우리는 세상적으로 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과 우리는 엄연히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철학과 종교와 방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와 철학 속에 어찌 인간에 대한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밖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구원받을 길이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고 십자가도 필요 없게 됩니다.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17:19-20

지금도 페르테논 신전이 있는 곳을 아레오바고라고 합니다. ‘아레오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그 당시 재판과 입법을 주관했던 의회의 모임 장소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종교, 도덕을 논쟁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17:21

이 말씀에는 아덴이라는 도시, 또한 아덴으로 대표되는 모든 메트로 폴리탄의 성격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것은 현대의 뉴욕이나 파리나 서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대도시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공통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특이한 것,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행에 민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도시가 다 그렇습니다. 항상 새로운 유행이 등장합니다. 머리 모양도 그렇고, 화장법이나 화장품도 그렇고, 옷 디자인도 그렇고, 구두도 그렇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보면 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다 다르답니다. 어떤 것은 옛날에 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내 유행을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다 돌고 도는 것인데도, 항상 새것이어야 된다는 것이 도시 사람들의 취향입니다. 새것을 제시하지 못하면 도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첨단 유행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허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꽉 차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허하기 때문에 이래도 만족을 못하고, 저래도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새 것, 색다른 것을 찾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도 그러한 새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유일하신 참신 하나님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 온 것 같으니 한번 알아보자 이것입니다. 이게 다 허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변덕도 잘 부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꽉찬 사람들은 이런 변덕이 없습니다. 오히려 옛날 것을 좋아합니다. 책도 그렇고, 책상도 그렇고 손때 묻은 것을 좋아합니다. 무조건 새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무엇이든 자꾸 바꿉니다. 안경도 이것을 썼다가 저것을 썼다 해야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오래 가는 것이 없으니 좌절감도 심합니다.

바울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속성을 안 바울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22-31절의 내용입니다.

2023년 12월 28일 오전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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