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1대통령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정치 지도자들이 권모술수를 행하지 않게 하소서
2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릇된 이념이나 선동이 아닌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소서
3주변 강대국들과 경제, 안보 갈등이 조속히 해결되게 하시고 한반도의 평화적 정세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19-2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행16:19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돈에 있습니다. 많은 얘기를 하는데 가만 들어보면 모두가 다 돈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이익이 생기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곧 시시하게 여깁니다.
왜 점쟁이가 될까요? 그 깊은 속을 보면, 그가 한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왜 많은 사람이 점을 칠까요? 그것도 진리대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많이 얻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거나 미래에 대한 더 안전한 보장을 얻으려는 생각들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점치는 여자에게서 귀신이 나가서 이제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점쟁이를 데리고 있던 주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점치는 여종을 데리고 있었던 것은 인류의 복지나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돈벌이를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실리를 핍박하고 감옥에 넣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존재이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는 성공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교회는 헌금을 많이 걷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래서 교인이 많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많은 종교들, 많은 단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적인 성공과 미래의 보장과 경제적 이익입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클럽을 만들고 종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점치는 여자의 주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결국 체포 당했습니다. 당시에는 빌립보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 일대가 거의 로마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늘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을 유대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아울러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과 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반 유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끌고 간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인 분위기를 이용했습니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행16:20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먼저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반 유대주의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우리의 성을 요란하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이 끊어져서 데리고 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바울과 실라에게 교묘히 죄를 덮어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미풍 양속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16:21그들은 바울이 귀신을 쫓아낸 행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들은 ‘내 이익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좋은 이유,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댑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마음 이면에는 자기가 손해 본 것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멋있는 얘기를 정치적, 교육적, 사회적으로 제시하지만 그 내면에는 탐욕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탐욕과 돈에 대한 이런 집착이 있는 한 부정부패는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의 관리들은 재판도 안하고 바울과 실리를 체포하여 구타했습니다. 22-24을 보십시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16:22-24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은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순탄하게 교회를 세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핍박과 고난을 당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당했던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11:23)" 그는 그 같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으로 복음이 건너오면서 첫 성 빌립보에 이르고,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나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면서 어렵지 않게 교회가 설립되고…… 어쩐지 순탄하다 싶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도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우상숭배 문제라거나 해서 복음에 정면적으로 충돌되는 사건이 있어서 핍박을 당했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이건 오늘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주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로 인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이 당한 많은 고통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가장 부당한 일로 당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사건입니다. 다른 데서 고난 당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고, 차꼬에 채웠다고 합니다.
차꼬에 채웠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옛 우리나라에서는 칼을 씌운다 해서 두꺼운 널빤지로 길쭉하게 만들어 죄인의 목만 끼일 만큼 구멍을 뚫어 가지고 거기에 죄인의 목을 끼워 고정시킨 형틀이 있었는데 이 칼을 쓰고 옥에 갇히면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므로 고통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차꼬라고 하는 것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구멍이 다섯 개입니다. 널빤지에 뚫린 다섯 개의 구멍에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을 끼우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를 이 차꼬에 채워서 가두고 지키라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도 없었거든요. 죄목도 매기지 않았습니다. 무슨 죄로 매를 치고, 무슨 죄로 감옥에 가두는지, 명분이 없었습니다.
구실을 잡고야 때리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죄목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네 죄를 네가 알렷다!"하는 으름짱으로 실토케 취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매는 왜 맞는 거냐, 이 말입니다. 심문을 한다면 바울이 술술 얘기를 할 것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을러메지도 않습니다. 그냥 끌어다놓고 가타부타없이 옷을 벗기고 때렸습니다. 맞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맹랑한 노릇입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이런 매도 맞아야 되는 겁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은 매를 맞을 때, 왜 때리느냐, 좀 알아보고 때려라, 얘기도 좀 해보자, 재판장을 만나자, 시장을 만나자, 하고 따질만한데도 그냥 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재판 이전입니다. 아무 판결도 없이 매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마디의 변명이 없습니다. 정당성을 피력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온유, 겸손한 가운데 매를 맞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말씀합니다. 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매를 맞을 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따질 것 다 따지고 매를 맞으려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똑똑해 가지고 자꾸 따집니다. 시어머니가 "너, 또박또박 그렇게 자꾸 말대꾸할 거냐?"하면 "말대꾸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합니다.
여러분, 이치란 보는 대로 다릅니다. 각도가 달라요.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아무리 애매해도 설명을 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세요. 팔자가 어떻다느니 이치가 어떻다느니, 억울하다느니, 원통하다느니 변명을 하지 마세요. 도대체 세상에 변명처럼 불 신앙적인 게 없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이유가 없었습니까? 바울이 지금 매 맺는 순간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부조리한 매라고 생각하지만 지나간 다음에 생각해보세요. 어때요?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빌립보교회는 확고한 기틀을 잡게 되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는 이유가 없지마는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좁은 생각에는 부당한 것 같지마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이 있지마는 하나님께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잠시잠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해서 따지고……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따지기로 들면 저쪽은 저쪽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나만 똑똑한 게 아닙니다. 그런고로 침묵하세요. 언제든지 진정한 신앙은 고통 앞에서 침묵하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매를 맞을 때에는 곱게 맞아야합니다.
거기에 변명이 있던가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으면 그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1-12예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고소를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어떠한 고난과 박해를 당해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주안 장로 교회 안강자 권사님은 전도왕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어느 날 권사님이 주안 전철역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건넸는데, 그 청년이 갑자기 권사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구둣발로 짓밟은 뒤 가 버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권사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권사님을 폭행한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없는 사람들을 때리면서 살아왔어도 저에게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를 때리고 난 그날부터 밤마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제 눈앞에 아른거려서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저도 아주머니가 믿는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놀랍게도 청년은 권사님에게 사죄를 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청년은 교회에 출석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여 지금은 필리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권사님은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전철역에서 깡패에게 맞아 쓰러지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로 인해 깡패가 변화되어 선교사가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권사님에게 주어질 하늘의 상급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바울과 실라 또한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의 고난을 통해 복음의 씨앗이 땅 끝까지 뿌려져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2023년 12월 8일 오전 6: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