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시니어 세대를 위하여
시니어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영적인 성장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현재의 삶이 지나온 삶보다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시고 주님 주신 사명이 말씀 앞에서 날마다 갱신되며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영육 간에 강건케 하소서.
시니어 세대가 가진 깊은 영성과 지혜와 믿음이 다음 세대에게 흘러가게 하시고 교회 안에 살아 있는 모범과 소망이 되게 하소서.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37-39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15:37-39우리가 본문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1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언제나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계시면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관점과 해석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내 식으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 자기주장만 하다 보면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즉 의견이야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사단의 공격에 의한 본질적인 문제냐, 아니면 문화, 관점, 해석, 경험, 지식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생긴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본질적인 문제라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라면 서로 수용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과 바나바는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헤어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그랬습니까? 사람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 즉 예수님과 하나님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문화적인 차이, 견해의 차이, 은사의 차이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2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일지라도 의견이 불일치가 있을 수 있으며 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싸우면 갈등이 없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싸우면 갈등이 생깁니다. 평신도들이 싸우면 문제가 없는데 목사들이 싸우고 갈라지고 헤어지면 시험에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싸우면 무척 갈등이 됩니다. 부모가 격렬하게 싸우고 내쫓고 이혼하면 자녀들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도덕적 사고가 흔들리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싸울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니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싸웠습니다. 즉 그들의 목표가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빨강색을 좋아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초록색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빨강색은 좋아한다고 해서 빨갱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도 자유요,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인 취향의 문제, 체질의 문제 때문에 서로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신중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막 벌리는 사람이 있고, 일을 축소하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서로 비판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선이냐 악이냐,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취향이 다른 것 뿐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 뿐입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도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을 자꾸 절대화시키려 합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절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감정까지 개입시켜서 야단을 칩니다. 그것은 나쁜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비판합니다.
살다보면 부부도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기본 전제가 흔들리면 안됩니다. 사랑한다는 기본 전제만 있으면 의견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의견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얼굴을 붉힐 수도 있고 큰소리 칠 수도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 사랑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더 발전하고 성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 지나쳐서 상대방이 내가 주장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심하면 헤어지게도 만듭니다.
우리는 같이 일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하나님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마가 요한이란 사람이 문제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철저한 과제중심의 인물이라면, 바나바는 사람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인물입니다. 과제의 달성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서 온전한 일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바나바의 주장입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의 선교팀이 앞에 놓여 있는 사명을 성취시킬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을 분열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대조적인 지도 스타일에 있었습니다. 누가 더 옳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가는 후에 4복음서 중 한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딤후 4:11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라고 일컬어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에서 자기가 있는 로마에 마가를 보내 달라고 그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40절을 보면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한 후에 실라를 택하여 함께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에게는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핍박과 환란만이 어려움이 아니고, 거짓 형제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애써서 전도해서 교회를 세워놓으면, 소위 바리새인들이 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총회를 통하여, 사도들의 공식적인 입장도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들고 아무리 외쳐도, 아직 외적으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 사도 바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여기 예루살렘 교회의 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에게 그곳에서 생각되거나 실천되고 있는 것을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라고하며 실라를 소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실라는 바울과 같이 로마의 시민권자로 여겨집니다. 행16:37을 보면 “저들은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렸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할 때 많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기에 선교에 많은 유익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