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환경과 생명을 위하여
온 인류가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질서대로 환경을 다스리게 하소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낙태와 아동 학대 등 생명 경시 풍조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환경과 생명을 위해 일하는 관계자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효율적인 정책이 세워지게 하시고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행15:23-2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행15:23예루살렘 공회는 합의점을 찾게 되자 이것을 이방 교회에 통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는 크리드(creed)입니다. '칙령'입니다. 교리입니다.
교리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완전한대로도 교리는 필요한 것입니다. 교리를 내세울 때에 여타의 분분한 의견들이 다 사라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사람은 이 소리, 저 사람은 저 소리를 내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교리 선언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서 배우게 되는 지혜는 사람만 보낸 것이 아니라 편지도 써서 보냅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와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몇 사람 건너가다 보면 와전이 되기 쉽습니다.
말과 글은 참 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글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10분의 1밖에는 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설가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하는 글의 전문가들도 50% 정도만 겨우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10분의 1정도 밖에는 글로 옮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글로 옮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그 내용과 사상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글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기록해놓으면 이것은 요지부동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나 똑같이 전해집니다. 2000년 전에도 오늘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지 못합니다. 말은 설명은 길게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일시에 전달할 때에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건너가다가 빠지고 붙여지고 하는 사이에 영 딴소리로 둔갑을 하는가 하면 침소봉대되기도 합니다. 엉뚱한 소리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전(口傳)과 문서(文書)---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래 복음은 구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록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베드로가 들었고, 야고보가 들었고, 요한이 들었습니다. 전부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증거를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가서 이제 사도들은 다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에게서 들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전하고 또 전하고, 다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전하고…… 이렇게 2대, 3대로 내려가다 보니 와전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이를 염려하여 마가가 마가복음을 씁니다. 처음으로 복음을 씁니다. 이후에 마태복음이 씌어집니다. 누가복음이 씌어집니다. 또한, 요한은 나이 많았을 때에 죽기 전에, 다른 사도들은 다 죽은 다음에 맨 나중까지 살아 있다가 '나도 한번 써야 되겠다'해서 요한복음을 씁니다. 보세요. 글로 씌어지지 않습니까?
말로 전해지는 것과 글로 전해지는 것이 합칠 때에 가장 바른 증거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말로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글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이치입니다.
자, 이제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결정된 것을 말로 전하라 하면 그만일 것 같지만 글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야 확실하니까요. 글만 보낸 것도 아니고 바울과 바나바까지 보냈습니다. 그 글 가지고 가서 말하라고 사람도 보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고도 또 하나 걱정이 있습니다. 아주 신중히 하고 있습니다. 가는 사람들이 당사자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안과 직접 관계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들의 말씀에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고 듣는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들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3자인 증인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가 그들입니다. 예루살렘공회에서 파송되는 사람들입니다. 증인 두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완전치 못한 법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어 바울이 설명을 하고, 유다가 옆에서 증거를 하고 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예루살렘교회에서 의논 되었던 바 본뜻이 가감 없이 전해지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시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어떤 의견을 전하고자 할 때에는 사람도 가야 되고, 글도 가야 되고, 증인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 가지 수단을 다 동원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거기서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잠깐동안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결정된 사실은 29절뿐입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것뿐입니다. 딱 한 줄뿐인데,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 때에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행15:24결론 한마디를 딱 잘라 전하면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는지 모릅니다. 말이란 말하는 편에서 할 말 해버린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듣는 편에서 어떻게 듣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릇 말이란 분위기를 봐가면서 해야지 덮어놓고 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정한 그것만 한 줄로 딱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결정될 때에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함께 말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 전하는 말과 '칙령'을 합쳐서 들을 때에야 듣는 사람들이 그 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행15:24그는 안디옥 교회에 가서 혼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송을 받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었고, 교회 내에서 위치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고 어떤 임무를 위임 받아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빌려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아닌데 매사에 간섭하고 끼어들어 판단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을 주도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만을 앞세우고 충성스럽게 주님의 뜻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3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주의 일을 성취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애굽의 왕자로 산 40년 동안은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바로의 왕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노예로 고통 받고 있던 동족 이스라엘을 자신의 혈기로 구원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도망자의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인생의 최고 정점에 있던 모세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초라한 목자의 삶을 살면서 바닥까지 낮아졌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낮아지고 깨어진 모세는 그 후 40년간을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나를 통하여 오직 주님만이 나타나시고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내 방법,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은 모세가 왕궁에서 보냈던 첫 번째 40년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 받았던 두 번째 40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나를 철저히 내려놓고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 받았던 세 번째 40년을 사는 사람입니다. 빨리 깨어지고 낮아질수록 빨리 쓰임 받습니다. 나를 내려놓지 않은 사람은 허송세월하다가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2023년 11월 17일 오전 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