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0

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북한을 위한 기도

1.

북한의 주민들이 주체사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김정은 3대 우상 체제가 무너지게 하시며 북한 전역에 있는 김일성 우상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2.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 세워져 있었던 3천여 교회들이 다시 회복되게 하시고 김일성 동상이 세워진 그 자리에 장대현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하여 주소서.

3.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과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그들이 속히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그날이 임하게 하시며 평화적 통일이 앞당겨지게 하소서.

4.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 주시고 탈북민들이 무사히 정착하여 북한 선교의 마중물로 쓰임 받게 하소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행15: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여행을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이후에 안디옥 교회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15:1

본문에 나오는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용이야 어떻든지 간에 전통대로, 교리대로, 형식적으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 할례의 의미는 없어졌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양과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온전하지 못한 구원, 목마른 구원이었습니다. 갈증을 느끼는 구원, 부족한 구원이었습니다.

오늘날에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뭔가 더 행해야 할 것 같고, 뭔가 더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헌금이나 봉사나 전도도 더 많이 해야 내 구원이 완성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음으로 이제는 양과 송아지의 피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바 되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하면 영원한 구원, 희미하지 않은 구원, 목마르지 않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뭔가 행위로, 기도로, 선행을 많이 쌓음으로 내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지만 무언가 좀 부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죄를 용서 받은 것 같지만 어딘가 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표를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자꾸 확인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자꾸 보면서 확인을 해야 안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남편이 눈앞에 있으면 안심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의심하고 불안해합니다. 항상 보고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1년 떨어져 있어도 믿어야지요. 10년을 떨어져 있어도 믿어야지요. 그게 부부입니다. 안 그러면 의처증, 의부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태입니다. 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썼을 것입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2-4

즉 할례를 주장한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지 어찌 할례 하나만 지키고 구원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이 둘 사이에서 싸움을 하며 삽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 내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인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조금이라도 내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율법적인 의무를 다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탄의 큰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흠이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절망감을 갖습니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옳지만 그럴수록 좌절감에 빠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이런 좌절감 때문에 고민해 왔습니까? 착해 지려고, 죄짓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안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뿌리에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이것이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지킨 분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오직 한 분만이 완전하게 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을 지키실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완벽한 인생을 살았느냐, 얼마나 실수가 없었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느냐를 물으십니다. 우리에게 실수와 허물이 있고, 죄가 있고, 야곱처럼 사기꾼 같은 기질이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제사가 끝났고,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으며, 모든 할례가 끝나서 우리에게는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1차 선교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시다. 그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이 그들이 선포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온 유대인들의 생각을 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꾸 ‘예수를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율법도 지켜야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여기저기서 가르친다는 자들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신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흔히 걸어 놓는 미끼가 성경 공부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변론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사단이 교회를 깨고자 할 때마다 써먹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교리적인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거짓 교사들과 다투고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끌면 마귀의 술책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딛3:10

놀랍게도 안디옥 교회는 변론을 오래 끌면서 자기 실속을 차리려고 하는 거짓 선생들의 음흉한 생각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행15:2
Archive

지난 말씀 보기

지나간 날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세요. 날짜를 선택하면 해당 날짜의 설교로 이동합니다.

전체 목록 보기

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