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방송 연예 종사자들을 위하여
연예인들이 세상의 인기와 명예보다 더 고결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 건강한 대중문화가 실현되게 하소서.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주님이 주신 달란트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왜곡된 세상을 그리스도의 문화로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방송·연예계의 우상숭배와 미신의 관습이 끊어지게 하시고 음란하고 퇴폐적인 죄의 문화들이 방송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15: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여행을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1차 선교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변화시켰습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도록 역사해 주셨고,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을 걷게 하셨습니다. 한편 두 사도에게는 고난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으나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하나님이 일으켜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전도했던 교회를 들러 양육을 하며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그들을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행14:22-23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한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를 듣고 은혜와 믿음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이후에 안디옥 교회는 유대로부터 온 형제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15:1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을 나란히 놓고 둘 다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돌아왔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은혜가 넘쳤지만, 그들의 방문은 교회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어린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끼친 피해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이 시간에는 안디옥 교회가 이 어려운 시험을 어떻게 대처하여 이길 수 있었는가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왜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할례에 대한 말씀을 잠깐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17:9-14이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제도입니다. 그것은 언약의 상징이었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사람의 살에다 표시하신 것이었습니다.
할례란 히브리 원문대로 살펴보면 '칼자국을 낸다' 혹은 '둘레를 자른다'는 뜻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다, 이방사람으로부터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해놓았다는 뜻입니다. 선민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지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얼마나 소중이 여기는지 모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생명같이 여기는)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요7:22할례는 옛 생활을 베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2:29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몸을 베지 말고 마음을 베어라 했습니다. 옛사람에 속한 것, 이방사람에 속한 것, 혹은 인간의 의와 같은 것을 베어버린다는, 깨끗이 잘라 베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종교예식인 것입니다.
할례에는 아주 신비로운 뜻이 또한 있습니다. 유대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선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선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선민이란 육체적인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지요. 아무리 유대사람으로 태어났고, 유대사람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해도 다 유대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선민은 아닙니다. 할례를 받아야 선민입니다. 그 때부터 선민입니다. 선민이란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사람으로 태어났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유대사람입니다.
동시에 이방사람도 할례 받으면 유대사람입니다.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선민이란 혈통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고백적인 것입니다. 신앙 고백적인 것입니다. 할례란 그러한 것을 아주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서 할례를 받아야 누구든지 유대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뜻이 있다면 몸에 새겨준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결혼 생활을 할 때에 사랑의 증거로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요즘은 결혼할 때 다이아몬드를 해주어 비싸니까 빼 놓았다가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그런데 빼버리거나 없어질 우려 없는 징표, 이것이 할례였습니다. 몸에다 표지를 준 것입니다. 핏자국, 칼자국을 낸 것입니다. '너는 선민이다'하고 도장을 찍어놓은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라고, 항상 잊지 말라고 이런 뜻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 받은 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갔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 생활 동안에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할례가 없었습니다. 할례가 없었기 때문에 유월절 잔치도 베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인도를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 앞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5:9하나님께서 그들의 수치를 제거하신 후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수5:10-11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잔치를 베풀면서 죽음과 모든 사탄의 세력을 이기는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게 됩니다. 가나안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의 점령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약속하고 약속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가 지나고 모세 때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이 할례를 율법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것을 형식적으로 행했습니다. 즉 몸에 상처를 내서 할례를 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식으로 타락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결국 초대 교회까지 내려와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의 형식만 남고 그 내용은 죽은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사랑은 없고, 제사 드리는 형식, 예배 드리는 형식, 설교하는 형식, 교회에 나오는 형식, 그 내용이야 어떻든지 간에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짓든 간에, 무슨 오만한 짓을 하던 간에, 형식만 잘 지키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되면 된다. 장로가 되면 된다, 권사가 되면 된다’고 하면서 이런 타이틀만 따면 신앙이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양을 보시지 않고 내면을 보십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십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정말로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심령 깊은 곳에 예수님이 계시느냐. 이런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종요의 내용은 무시하고, 그것을 전통화하려고 합니다. 교리화하고 형식화시키려 합니다. 이러한 형식화, 교리화, 상징화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십자가나 성화같은 것이 어느 때는 믿음에 좋은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없이 형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금식을 하거나 십일조를 드릴 때도 형식적으로 한다면 위험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런 형식들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외적인 활동들만 가지고 ‘아, 저 사람 굉장한 사람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에 자신이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