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다니엘기도회를 위하여
‘열방과 함께하는 2023 다니엘기도회’가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기도회가 되게 하시고 이를 통하여 온 민족과 세계 열방에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다니엘기도회에 참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치유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세우신 강사들과 찬양팀에게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예배하는 처소마다 현장감 있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모든 성도가 말씀과 찬양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게 하소서.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14:19-20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행14:19복음의 반대자들, 핍박자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사도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했던 일단의 무리들과 이고니온에서 사도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했던 일단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서 지금 루스드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을 충동했습니다. “바울을 죽여야 한다. 돌로 쳐서 죽어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조금 전에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 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짚고 넘어갑시다. 본문에 보니 루스드라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요샛말로 말하면 소위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무리를 충동하여 돌로 바울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설명이 있습니까? “죽은 줄로 알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무리가 바울을 죽을 정도로 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돌로 쳤는지 성경에 자세히 안 나오지만, 죽일만큼 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여러 사람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돌에 맞았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그의 시체를 성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14:20복음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보다 더 큰 영광과 기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더 큰 축복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20절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 바울 주위에 제자들이 둘러섰습니다. 그리고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울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두 번째로 발견하는 것은 더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죽을 정도로 맞고 일어난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일어나자마자 다시 성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집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구하고든지 싸워서 감정이 좀 격해지면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피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매를 맞았다면 더욱 더 상대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일어나서 곧바로 어디로 갔습니까? 자기를 돌로 친 자들이 있는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한 사람들이 있는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1956년 1월, 미국의 유명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짐 엘리엇이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야만적인 중남미 에콰도르 아마존 정글의 와오다니족 (아우카족)을 대상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마침대 원주민들의 근거지를 알아낸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용기와 모험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만 현장에서 창에 찔려 비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8살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젊은 아내 엘리자베스는 그 충격적인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을 절제한 채, 남편을 죽인 그들을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들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헌신한단 말입니까? 그때 엘리자베스는 말하기를 “몇 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5명의 미국인 중 한 사람의 아내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들을 죽였던 원주민중 두 사람이 회개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힘들게 했던 사람을 또 만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 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 날 바나바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가 넘쳐 나고 모든 것이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비가 온다고 손 놓고 쉴 수만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나가면 됩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고 집에서만 꼼짝 않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추워지면 옷 하나 더 껴입고 나가면 됩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어려움이 다가온다고 섭섭해 하면서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더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누가 나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내가 다시는 봉사를 하나 보자’ 하면서 돌아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비가 온다고 ‘오늘은 일하러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야겠다’하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에 가기 싫고, 예배드리기가 싫어도 ‘아, 내 신앙생활에 찬바람이 부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더 일찍 가서 더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돌로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초죽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자기를 박해했던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어려운 일도 있고, 고난 당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이나 모함을 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거기서 주저앉으면 안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고 문제와 어려움, 고통과 상처가 있어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참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영적으로 강건해 집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나바와 함께 옆에 있는 성인 더베로 가서 또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의 관심을 오직 복음 전하는 데에만 있습니다. 가만히 이 모습을 묵상해 보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일이 있는데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어떤 사람이든 다 자기 나름대로의 관심이 있습니다.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 외모에 관심이 있는 사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 등 관심거리가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관심거리 때문에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살기도 합니다.
복음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음을 덜 중요하게 여깁니다. 상황이 중요한 사람은 예수가 덜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그런 문제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매를 맞아 기절할 정도가 되었지만, 하룻밤 사이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제 한바탕 싸우고 난리가 났더라도 아침에 일어나면 ‘할렐루야’하고 또 전도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안디옥, 비시디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 사도 바울을 핍박 하는 곳도 있었고, 덜 핍박하는 곳도 있었지만,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능력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복음을 믿기 바랍니다. 이 복음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하거나 환영하지 않거나 이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반응이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가정이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세상이 안 변한다면, 그런 좌절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예수라면, 진짜 복음이라면 세상에 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도 변할 수 있습니다. 더베도 변했고, 이고니온도 변했고, 루스드라도 변했고 안디옥도 변했습니다.
환영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을 던져 죽을 만큼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면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하면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능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