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이 땅을 덮어 주셔서 우상 숭배의 죄악들이 끊어지게 하시고 교만과 자살과 음란의 분열의 영이 묶임을 받고 떠나가게 하소서
창조의 질서를 부정하는 비성경적 법률이 제정되지 않게 하시고 복음으로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인간의 탐욕으로 깨어진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사 저출산과 기후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13:24-2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본문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에 설교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나 7장의 스데반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긴 설교를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23절에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13:24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는데 곧 예수라. 그가 오시기에 앞서 (백성들이 구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17:10-13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칭찬하였는데,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그 일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1:31"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30어떤 상황에서 한 말입니까?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질투심을 유발시키는 말을 듣고)"
요3:26"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28-303:30 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지금도 과분하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얼마나 겸손한가요?)"
행13:25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를 나타내고, 예수를 높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 또한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0-21사도 바울의 설교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설교 또한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 주제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의 사건으로, 혹은 옛날 이야기로, 혹은 어떤 지식을 제공하자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사건과 우리의 생명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라고 구원을 주제로, 구원을 설교의 목적으로 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 설교에 걸쳐 역사적 사실 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코 어떤 추상적인 진리나 그가 깨달은 어떤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저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이해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예언자의 이런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 그들을 40년이나 광야에 두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출애굽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자는 것이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구속사적 의미, 그것의 현재적 의미, 어쩌면 영원한 의미,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적 역사의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사건을 바로 이해하기 시키기 위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적 사건 안에서 성서적 증거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하신다,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사건을 계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설교 방향이요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스토아 철학에서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습니다. 불교에서도 그렇습니다. 윤회사상을 말합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를 둥글게 보는 것입니다. 윤회적 사건으로, 돌고 도는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라는 윤회 사상은 그렇듯 합니다.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많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엊그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아닙니까? 일본을 보고, 중국을 보십시오. 6. 25 사변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일본과 중국을 오갑니다. 역사가 이렇게 바뀝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되고, 오늘의 우방이 내일은 원수가 되며, 어제 잘살던 나라가 오늘은 비참해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 비참해진 나라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땅히 뭔가를 깨달아야합니다.
옛날의 그 찬란했던 문화가 이제는 고고학적 자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로마는 망했고, 왜 베르사이유 궁은 망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시황은 무엇을 생각하며 죽었을까요?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역시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돌고 도는 것은 순간입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무한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는 사이클 라인이 아닙니다. 직선적입니다.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이 환생을 한다느니 전생이 어떻고 후생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전생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도 끝도, 알파와 오메가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의식에는 창조, 섭리, 심판이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항상 바르게 계시해주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차원에 다시 한번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예언한 바에 대한 성취로 나타납니다. 예언은 있고 성취가 없다면 그 예언은 바람맞은 것입니다.
성취가 있어야 예언이 예언입니다. 성취를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취가 사건으로,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만 그 예언의 예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성취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서 구약성경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예표가 있습니다. 미리 보여준 표가 있습니다. 제사가 있고, 성전이 있습니다. 예배, 제사 드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금촛대가 있고 제단이 있고 제물이 있고 제사 음식이 있습니다. 상징들입니다. 예표입니다. 예표에는 실재가 있습니다. 실재가 없는 예표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초점을 잃은 역사의식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이 있습니다. 상징에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이 있어야 상징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라는 것이 사랑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보면서 아, 그거 좋구나, 나도 하나 사서 껴야겠다--이러면 됩니까?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은 준 사람이 있고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준 사람이 없는 결혼반지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한낱 백화점 상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가 주었느냐--그 실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야 그것을 담은 상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없다면 그 많은 상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있습니다. 본체 없는 그림자는 환상일 뿐입니다. 안식일이라든가 율법이라든가 시내 산 이야기 같은 것이 전부 그림자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림자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림자입니다. 요단강이 그림자입니다. '요단강'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입니다. 그 실재는, 그 본체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한 그림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그 모든 그림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본체가 있습니다. 본체 없이 그림자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사도 바울이 깨닫고 증거하는 바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쳐보았지만 이 율법, 이 구약, 이 예언, 이 상징, 이 예표, 이 그림자가 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율법을 아는 유대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이렇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