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다니엘 기도회를 위하여
매 예배 시간마다 기름부음이 넘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병을 고침 받고, 문제를 해결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젼을 갖게 하여 주시고, 성령 충만을 받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13:17-2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있고,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는 바울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들을 모아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모두가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 때부터 해서 도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그 역사의 초점을 예수그리스도께 맞춥니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하는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왜 역사를 이야기합니까? 기독교의 교리는 바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다른 말로 말하면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활 규범이나 철학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역사를 토대로 전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역사성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함께 하셨다, 이 민족의 역사 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役事)하셨나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의 시점에 우연하게, 뜻밖에 이루어졌던 일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 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임을 강조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역사 하셨으며, 인류역사뿐만 아니라 우주의 역사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온 인류의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役事)와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륜적 사건이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를 들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역사를 이끌어 오시고 예언하시고, 예표를 들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실제의 사건으로 성취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거기서부터 설명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혔으면 짐승(양)이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피가 묻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육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죽옷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생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뿐입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제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다. 이렇게 설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그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바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의 그림자요 예표인 것이다, 그 모든 사건이 예비, 준비해 두셨다가 오늘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다,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다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라고 누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역사의식이요 역사관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비록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된 일이지만, 장소는 안디옥이지만, 모인 사람은 유대사람들이요 장소는 유대 회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 역사를 다 알고 있습니다.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외었거든요.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다 외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왜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냐? 여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듣는 자들이 다 안다고 전제하고 본문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니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하고 설명합니다.
듣는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해서 그 의미를 알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의미를 모릅니다. 읽기는 읽는데 뜻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알게 하는 것이며, 알게 하되 어떻게 알게 하는 것이냐, 궁극적으로 무엇이 초점이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냐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구스의 내시가 마차를 차고 가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읽습니다. 양이 사지(死地)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것과 같다. 양의 희생에 대하여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 때에 빌립이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희생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줍니다.
이래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경험하기도 하고 읽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해석상의 문제가 따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을 말씀합니다. 역사의 초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본문에 누누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인도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구원받았습니까? 애굽에서 나온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한심합니다. 저는 성경 읽을 때마다 슬며시 부아가 치밀고 때로는 욕이 나갑니다. 보세요.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를 건너고…… 이만했으면 그 감격이 적어도 1년이라도 가야 하겠는데 금세 물이 좀 없다고 해서 원망을 합니다. 고작 열 나흘만에 나오는 원망입니다. 감격이 열 나흘밖에 안 갔다는 것이 아닙니까?
18절을 보니까 "광야에서 약 사십 년 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그렇듯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죄짓는 대로, 하나님 원망하는 대로 내려치셨다면 진작에 다 끝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래오래 참으셨습니다. 못돼먹게 굴어도 참으시고, 원망해도 참으시고 --하나님께서 이렇듯 무던히도 참고 참으셨기에 그나마 몇 몇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살아남았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참으셨다, 하나님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선택하시고 인내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19절에 보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기기까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저들은 들어가 차지한 것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겼고, 용맹해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저들은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제는 또 왕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섭섭해하셨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왕을 달라고 할 때에 저들이 나로 하여금 왕 되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하셨습니다. 왕이 왜 필요하냐, 율법대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다 평안할 것인데, 원수가 쳐들어와도 내가 다 막아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왕이 필요하냐--그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딴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왕을 세우고 만세 부르고 으스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왕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졸라대니 하나님께서는 양보를 하십니다. 크신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울이 처음과 다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십니다. 이 다윗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리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을 왕권을 모델로 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다윗의 왕권과 왕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되시고 제사장 되시고 왕이 되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13:23바울은 아주 절절하게 취사선택을 해가며 짧은 시간 안에 풍부한 지식을 사용하여 구약의 메시지를 이렇게 뛰어나게 요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 얘기를 바울이 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다윗 왕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그 왕의 씨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바울의 관심은 구약에 있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에 담긴 그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며 결국 다윗 왕에까지 이르고, 또 그 다윗의 씨에서 메시아가 나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약속된 메시야, 그 약속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따라서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6모든 선지자들이 예언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행10:43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감옥에 있든지, 파선한 배에 있든지, 토인들이 있는 섬에 있든지, 로마의 감옥에 있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