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북한을 위한 기도
북한의 주체 사상이 무너지게 하시고 남북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분단의 아픔에서 해방되어 복음적 평화 통일을 이루게 하소서
북한 전 지역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게 하시고 북한 전역의 3만 8천 여 개의 동상과 우상들이 철거되며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는 14만 지하교회 성도들과 수용소에 있는 성도들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고 영양부족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북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 주시고 탈북민들이 무사히 정착하여 북한 선교의 마중물로 쓰임 받게 하소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13:13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13:13여기에서 나오는 요한은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를 좇아 선교 여행을 수종자로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바보에서 버가에 가는 길목에서 마가라는 요한은 웬일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는 안 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선교 여행을 하다가 포기를 하고 만 것입니다.
분명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아마도 마가가 시험든 것이 분명합니다. 가다 보니까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식이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귀신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무서웠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향이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신나겠지만 자기는 뒤에서만 일을 해야 하니 나는 이게 뭐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중하차를 하고 만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는 없어집니다. 그렇게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마가와 같은 경우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처음도 잘하지만, 끝도 잘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고난이 오는 법입니다.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항상 천사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아주 신경질 나는 날들이 옵니다. 더구나 오해를 받을 때는 억울해서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분을 내며 하던 일을 놓고 가 버립니다.
‘내가 뭐 할 일이 없어 여기서 일을 하냐? 내가 뭐가 좋아서 월급도 받지 않고 일하냐?’
그렇게 말하고는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합니다. 선교라는 것은 방법이나 제도나 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이 있으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일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마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일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문제에 부딪히니까 당황한 것입니다. 도중에 일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행15:37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됩니다.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할 무렵에 이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미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행15:36-41바울과 그의 일행은 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전도했던 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그들이 잘 믿고 있는지 혹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었고 심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가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마가도 데리고 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비록 자기들을 배신하고 선교 사역을 하다 도중에 포기하고 떠나 버린 사람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데려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신하고 떠난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런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마가 때문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둘은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투고 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둘은 갈라섰습니다. 마가 요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나바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을 사람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일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 그 일을 포기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교회를 세웠다는 말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많이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사람을 좀 잃는다 할지라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바나바의 3차 선교 여행이라는 말은 없지만,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선교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유형의 사람 가운데 누가 좋고 누가 나쁜가 보다는 은사가 다르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할이 서로 다를 때 이것은 서로 상호 보완하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거의 모든 연인들이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 나면, 놀라울 만큼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닦는 일에 있어서도 치약을 사용할 때 중간을 짜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치약 밑 부분에서 부터 말아가며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빨리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시한 것이라도 다 주어다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주워 오면 아내가 버리고, 남편이 또 주워 오면 아내가 또 버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 부부는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 외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부도 잘 살아갑니다.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서로 보완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비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죄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게 약점을 보였다면 그것은 비판하라고 보여준 것이 아니라, 나더러 그 약점을 보완하라고 보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성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일치인 것입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발견할 때 교회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사역 초기에 서로 갈라졌지만, 우리는 그 사건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인간은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바나바나 바울이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서로 싸울 때도 있고 또 갈라질 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메세지는 바나바와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바울의 하나님이 위대한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싸울 수 밖에 없고, 때로는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두 번째로 서로의 은사가 다르다는 것은 서로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라는 뜻임을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세 번째로, 역시 사람은 갈라질 수도 있는 존재구나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나바와 바울이 실제로 부딪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라짐은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축복일 수 있으며, 그 갈라짐이 오히려 축복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과 사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스런 사건으로 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23년 10월 14일 오전 6: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