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이단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어지럽히는 신천지와 이단 세력들의 거짓된 정체를 밝히 드러내사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익한 구원자이심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소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거짓된 말과 유혹에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의 능력과 영적 분별력을 허락하소서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단과 사이비 세력, 그들을 조종하는 더러운 세력이 무너지게 하소서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행13:4-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안디옥 교회에는 5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이 음성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보낸 것입니다.
13장에서 보게 되는 이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고, 영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지는 그런 사건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소란하기만 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건이지만 역사적인 사건이 되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두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두 사람을 파송했다는 것이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그것은 오순절 사건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두 사람을 보낸 이 사건은 세계 선교의 문을 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공식적인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을 받고 안디옥 교회를 낳고,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이 구조가 바로 사도행전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런 구조를 따라가지 않는 교회는 의심스런 교회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적인, 성경적인 교회가 아닌 어떤 인위적인, 세속적인, 시대적인 교회에 불과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즉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4-5절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행13:4-5이 말씀에서 우리는 최초의 선교사의 공식적인 활동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여기에서 발견합니다.
1선교사나 교회가 하는 선교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보내심을 따라 움직인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주를 섬겨 금식하다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당사자인 바나바와 사울은 물로 다른 동역자들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음성을 듣고서 ‘나는 음성을 들었으니 가겠다’는 식으로 단독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의 음성을 나 혼자 들었으니까’하며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는데 있습니다. 의논하며 이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인가 확인해 보는 그런 조심스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서로 확인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바나바와 사울에게 선교사로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이런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두 사람이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라는 항구를 거쳐서 구브로라는 섬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 구브로라는 섬으로 맨 먼저 가도록 하자는 안을 누가 결정했냐는 것입니다. 누가 그 아이디어를 냈습니까?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선교한다는 시작은 같은데, 그 과정에서 성령님의 음성에 예민하지 않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성령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단독으로 결정하여 밀고 나가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 확인하는 과정, 이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교회에서 분란이 많이 일어나게 되고 선교가 실패를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 단체나 혹은 교회 안에서 특별히 선교 헌신자들이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는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데서 연유합니다. 선교의 환상을 보았거나 부름을 받았거나 음성을 듣고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정말 그 날을 기다리며 훈련을 받고, 그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예언이나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깊이 기도해야 하는데 바나바와 사울은 선교사로 가기 전까지 안디옥 교회에 소속되어 성도로서의 모습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봉사하고 성경 공부하고, 우리 식으로 쉽게 설명하면 구역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열심히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교사로 갈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필요 없다. 선교사 훈련만 받아야겠다’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성령의 음성을 듣고 ‘너는 이제 가라, 가도 된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사로 헌신할 때부터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란 지금 당장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준비하고 봉사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바로 선교에 대한 헌신의 시작입니다.
둘째로 4-5절에서 발견되는 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인정을 받고 출발을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정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는 선교사로 가겠다.’ 하며 혼자 쏙 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로부터 ‘저 사람은 선교사로 가도 된다’는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나 혼자 가겠으니 교회에서는 그냥 지원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가도 좋겠다. 그게 성령님의 인도와 생각인 것 같다고 공통적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인정된 바나바의 사울이 어떻게 선교하러 갔습니까?
먼저 선교의 1차 행동은 가깝고 익숙한 장소,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배를 타고 어디로 갔습니까? 구브로라는 섬으로 갔습니다. 이 구브로라는 섬은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행4:36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향이었기 때문에 바나바에게는 얼마나 익숙한 곳이었겠습니까?
두 번째로 구브로 섬에는 살라미라는 항구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살라미에 도착하여 어디를 찾았습니까?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경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라는 장소가 굉장히 익숙한 곳입니다
세 번째로 그 사람들이 데려간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인데 원래는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은 골4:10을 보면 바나바의 생질, 곧 친척입니다. 친척이니까 얼마나 익숙하겠습니까?
고향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척 마가 요한입니다.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선교 전략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팀 워크입니다.
선교사로 가기 전에는 첫째 바나바와 사울처럼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면 안됩니다. ‘이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주니까 빨리 등록해서 1년 정도 다닌 다음에 선교사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백발백중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교제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한 명의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이 생겨야 합니다. 교제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사람이 선교사로 나간 후에도 교회가 지속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애정과 사랑과 기도를 공급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보낸 안디옥 교회는 얼마나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교회와 서로 주고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헌신과 희생을 했기 때문에, 교인들은 그 헌신과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어느 단체가 교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교제권과 사랑의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