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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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농어촌 교회와 개척 교회를 위하여

1.

한 영혼을 바라보며 목양에 힘쓰는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지역사회를 복음화 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는 능력의 종이 되게하소서

2.

교회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좌절하거나 낙심치 않게 하시고 도시 교회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농어촌 교회와 개척 교회를 돕는 데 더 열심을 내게 하소서

3.

사역 환경의 위기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그들의 수고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6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바로 그 예수쟁이들이 믿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참 기막힌 일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을 보았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 속에서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입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때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어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무슨 말이나 변명이나 맹세를 할 여유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거두절미 하시고,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십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따위의 시시한 소리도 들으려 하시지 않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대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이 사건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울을 만나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준비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어떤 사건도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우연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신앙이 생기면 우선 사건이 해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애에 들어오시면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내 생에 들어오시면 과거가 열립니다. 닫혀 있던 과거, 황충이가 먹어버린 나의 과거, 해석할 수 없었던 고난에 가득 찬 나의 과거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동시에 내가 가야 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울을 위해 어떤 준비와 계획을 미리 하고 계셨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부르시지 않습니다. 계획에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후에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1:15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 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제 부름 받은 것이다 -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사건을 해석하는 힘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해석이 안되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면 “내가 이런 가정에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내가 이 대학에 떨어진 것도 병들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고 다 알게 됩니다. 과거가 자꾸 해석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까지 해석을 했습니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시편에 보면 “나를 모태에서 조직하셨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정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으면 거기까지 갔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이렇게 끊을 수 없는 깊은 해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나를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나를 모태에서 조직을 하신 그 정도가 아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미 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적당히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택하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기왕 사울을 만나셨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쳐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너 그 동안 잘못했다, 네가 스데반을 죽인 것도 잘못했고, 이런 것 저런 일 다 잘못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회개하고 열심히 복음전하라, 베드로에게 가서 순종하고, 배우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라 - 이렇게 하나 하나 꼭 찝어서 설명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딱 한마디밖에 안 하셨습니다.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리고는 왜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을까,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여기까지만 가르쳐주시고, 만나주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계시다는 것, 그리고 만나주시는 것으로만 끝나고, 이상하게도 그 다음 일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들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아주 귀한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직접 다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했다 하는데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님으로부터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신앙 선배로 부터 배우고, 교회에서 배워야 하겠는데 그러지를 않고, 시시하게 그럴 것 뭐 있나, 직접 배우지,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 직접 부딪치려 하다가 사고 납디다. 거기서 성경을 다 배워 가지고 내려오겠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성경 졸업하고 내려오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계시도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에게 가서 들으라 하셨습니다. 내가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초대교회 사도행전은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마는 사도행전 2장, 3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했다고 해서 통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해서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2:42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가 체험한 종교적 체험에 대하여 성서적 해석을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로 아나니아를 통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슨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보니 사도 바울을, 사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다 받았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다 받았다, 누구의 말도 안 듣는다 하는 교만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나니아로부터 배웁니다.

그리고 특히 아나니아에게 붙여진 호칭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10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제자'라고 하는 말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제자라고 일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두루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단어는 같은데 그 쓰이는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 잘 믿는 사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 사람은 지금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는 길이 아닙니까? 좀 더 직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해치려고 가던 길입니다. 아나니아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고자 다메섹까지 가는 길인데 예수님께서 딱 붙드시고 굴복시킨 다음에 말하자면 네가 죽이려고 하던 바로 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 하시는 것입니다. 기막힌 순간이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울 그가 하찮게 여기는 무식 한 사람들, 율법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런 사람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 사람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참 못 할 짓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체통이고 뭐고가 완전히 말살 당하는 순간입니다. 자존심 완전히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한테 가서 나 살려주십시오, 나 안수해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하는 일인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회심이거든요. 사울은 이제 전혀 딴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변하고 보니 그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죽어 마땅하고' 그래서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 먼저 믿은 아나니아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심입니다. 곧 교회라는 공동체의 성격을 보여주심이요 성도의 교제를 보여주심이요 도움 받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주심입니다.

여러분, 내가 계시를 받았다고 '나는 계시 받은 사람이다'하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기막힌 체험을 했었어도 먼저 믿은 아나니아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직선적인 은혜가 있지만 다시 성도로부터 배워야 하고 같은 제자들로부터, 혹은 주의 종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인격의 훈련, 성품의 훈련, 관계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사가 한 사람의 육체를 다루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합니까?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다루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얼마나 고도의 훈련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이런 것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은 인격적으로 성숙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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