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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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1.

대통령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고 늘 겸손한 자세로 나라를 이끌어가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되게 하소서

2.

이 땅의 위정자들이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이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인정하게 하소서

3.

이념, 지역,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사라지게하시고 소통과 화합을 통해 분열된 국론이 하나 되게 하소서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9:3-5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3-4

대제사장에게서 체포 명령을 위임받고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 자기 정의감에 충실하고자 큰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이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울에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임한 것입니다. 순간 그는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겠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순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오순절 이후의 최대의 사건이었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정의감에 충만한 사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죽어간 것을 그는 종교적인 감성주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여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생각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일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아무도 자신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바랍니다.

3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홀연히’ 어디로부터? 하늘로서

무엇이? 빛이 저를 들려 비추는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뭐라고 했지요? 홀연히. 어디로부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뭐가 있었습니까? 소리가 있어 입니다.

이 사건과 행2장의 오순절 사건은 비슷합니다.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이 120명의 공동체에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한다면 다메섹 도상에 임하고 있는 이 빛은 한 개인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엎드려져 있는 사울에게 하늘로서 신비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울아’하고 한 번 부르지 않고,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울에게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다는 어떤 의미를 두고 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가 사람을 부를 때 ‘목사님’하고 한 번 부르지, “목사님, 목사님”하는 식으로는 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 주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두 번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내게 너에게 목적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1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했고,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네가 내 품으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기다렸고, 내 사랑을 받아 주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너는 어찌하여 사랑의 반응은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아, 사울아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건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어찌하여 나의 교회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8:3에서

"사울이 누구를 핍박했다고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행9:1절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 놓고 욕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일도 없습니다. 교회를 잔멸하고,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10:4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5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이 순간에 뭐하고 대답했습니까?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9:5

사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신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보는 순간에 그는 “주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퀴어리어스” 곧 우리의 “주님”이지 “당신”이 아닌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를 이렇게 찾아와서 이렇게 무릎 꿇게 하시는 나를 꺾으신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아무도 나를 꺾을 수 없었는데 나를 꺾으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음성 앞에서 더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거부하고 주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로마 병정이나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나는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교회를 핍박했다면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핍박했다면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성도들끼리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은 예수님과 싸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다툴 일이 있어도 참고 이해하면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합니다. 서로를 위하지 않고 교회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압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위해서라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종 성도들이 머물고 지나간 곳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있는 곳보다 더 어지럽혀 있어나 더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다 같이 모인 예배나 모임 자리에서 사소한 일에도 큰 소리를 내서 불편을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위해 하듯,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가꾸고 돌보아서 교회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아름답게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축복의 통로, 치유의 통로,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항상 교회를 통해 세상에서 병들고 지친 영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주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서 무거운 죄악과 질병의 짐을 진 사람을 변화시키고 치료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임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울을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모른 채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잘못된 신념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몸 된 교회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울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023년 8월 20일 오후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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