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가정마다 예배와 기도가 멈추지 않으며 사랑의 언어로 서로를 축복하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의 모든 관계가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소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바르게 양육하는 성경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되게 하소서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9: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가 그의 조국을 결정합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인생의 큰 줄기를 결정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가 가정을 결정합니다. 어떤 신을 만나느냐가 영혼을 결정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인생과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인생은 출발부터 끝까지 다 다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울이 예수를 만나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오순절 이후 최대의 사건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사울이라는 한 개인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가 복음의 축복을 받게 되는 일이 바로 이 청년 사울이 예수를 만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세상이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여러분의 가정이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이 사회가 온통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일들을 만들어 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 또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한 집사님의 고백 - 사춘기 자녀 - 방법이 없었어요.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몇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자라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전통과 히브리 율법에 아주 정통한 사람으로, 정말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소라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다소라는 곳에서 자랐다는 것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을 배워 익숙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로마의 정치와 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서 우리는 정통 유대주의를 보게 되고, 헬라 문화와 철학을 보게 되고, 로마의 법과 정치를 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당대 석학이라고 일컬어졌던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지성인의 자격을 완벽히 갖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그는 무식하여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교 핍박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좀 무식하고 감정적이고 맹목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지성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에게는 행동이 없습니다. 나약한 것이 그들이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머리는 분명히 뛰어나고, 판단력도 빠르고, 비판력도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지성인이 가진 약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지성인에게 이런 말을 붙여줍니다. ‘사색하는 지성인’ 굉장히 멋있는 명칭 같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이 청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걸 줄 아는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누가 부추겨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켜서 하는 일은 시킨 만큼의 일 밖에 못합니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을 월급 받은 만큼의 일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그 이상을 합니다. 보통 세상살이를 살펴보면 시키는 만큼만 일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있고, 비록 사람이 시켜서 월급 받고 하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미의 보람을 그 일에서 찾으며 창조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동하는 지성인,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굶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그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9:1-2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울의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나쁜 선입관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표현을 보면, 사울이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 나쁜 감정과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예수쟁이들 보기만 해도 밥맛이 없다” ‘개독교’
물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남의 허물을 보고 개혁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사람은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30대 중반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 부부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서울대학교의 학생 운동권에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부인은 이대에서 운동을 활발히 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민중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논문을 마치는 그런 시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독교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보다는 이데올로기를 더 우선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논문을 쓸 수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민중 신학에 기초한 그 논문을 신앙 양심상 더 이상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 달만 지나면 학위를 받을 수 있을텐데 이것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학위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아껴 주고 격려했던 동료들이나 교수님들과 선배들에 대한 미안한 때문에 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너무나 많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택할 것인가? 학위를 택할 것인가? 이후에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가기를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똑똑하고 냉철한 지성을 가졌던 그들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 생애에 이러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그런 만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예수님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로마를 변화시키는 만남, 유럽을 변화시키는 만남, 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만남이 될 수 있습니다.
2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예루살렘에 데려오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얻어 다메섹까지 직접 갔던 그런 행동파였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수리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BC 2,000년 경부터 이 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그 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들어 유대인 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수다한 교인들이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피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 나라가 정치적으로는 로마 속국이었으나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곳이면 비록 외국이라 할지라도 대제사장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회당은 대제사장의 명령이 하달될 수 있는 말단 조직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허락만 얻으면 원하는 대로 사람을 검문, 납치, 투옥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가지고 살기등등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옳은 것에 대해서는 행동할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학도 포기하고 교도소까지 들어갑니다. 고문도 당합니다. 그래도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누가 월급을 준 것도 아닙니다.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굉장히 대단한 모습들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1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나 지성이나 신앙을 몹시 경멸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비추어 불의요 부정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경멸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2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그런 행동들은 결코 대가를 바라거나, 어떤 유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신앙의 양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고통을 겪고, 쫓겨 다니고,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과 뿌듯한 마음을 가집니다. 심지어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라든지 고통은 신앙의 엑스타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클라이막스와도 같은 그런 가지 나름의 자부심을 갖습니다.
3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 행동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저질러야 했던 불법들입니다. 과격한 주장을 하다보면 법을 어겨야 하며 폭력을 사용하게 되고 투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생길 때면 그들은 그런 폭력과 불법과 투쟁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의 필연적인 요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용서받아야할 과오였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회 개혁가나 행동주의자들의 행동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의 행동에 대한 신성과 우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의 행동을 쉽게 정지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방향이 잘못되었고, 혹 폭력을 썼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지성인들 앞에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인들을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좀 잘못되었어도 나는 행동을 했다’ 이것은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다른 주장이 잘 먹혀들지 않습니다. 뭔가 좀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을 바꿀 수가 없고, 도무지 설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이나 기정 세대 사람들로서는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나이 60이 지나서야 반성을 합니다. 4, 50대만 해도 반성을 안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모든 것을 뒤돌아볼 수 있는 60세 때나, 그 후에 죽을 나이가 되어서야 젊었을 때 했던 행동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23년 8월 19일 오전 6: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