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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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농어촌 교회와 개척 교회를 위하여

1.

한 영혼을 바라보며 목양에 힘쓰는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지역사회를 복음화 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는 능력의 종이 되게하소서

2.

교회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좌절하거나 낙심치 않게 하시고 도시 교회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농어촌 교회와 개척 교회를 돕는 데 더 열심을 내게 하소서

3.

사역 환경의 위기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그들의 수고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8: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모든 땅으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8:2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스데반을 죽인 악한 세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을 존경하고 좋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경건한 일단의 사람들이 스데반의 장례를 치러 줍니다. 스데반의 생애는 여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누구나 다 빈손으로 죽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떤 영향력을 끼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그 다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느냐를 결정합니다.

여기에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특별히 이 '경건'이라는 말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아주 조심성 있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고넬료를 가리켜 경건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경건하다고 말씀합니다. 행3장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고 말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원래 '경건'이라는 말은 유대사람에게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두려워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총괄한 하나의 용어가 바로 이 '경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로 칭찬을 들어야 합니까? 무슨 말로 칭찬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말할 때에, 특히나 믿는 사람들끼리 말할 때에 "아무개 집사님 참 똑똑하셔" 한다면 이것은 욕이겠습니까, 칭찬이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쁘다는 말입니다. 똑똑하니까 자기 앞가림이나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들어야 할 제일 좋은 말로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는 "저 사람은 참 경건해"하는 것이요, 둘은 "저 사람은 참 진실해"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가정 일이든, 직장 일이든…… 모든 일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수직적 관계를 크게 여기고, 수평적 관계를 작게 여기는 이같은 사람을 경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사람과의 관계만 너무 크게 생각해서 심지어 교회에 나와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보다는 옆에 누가 앉았나 하고 주위를 자꾸 둘러보기나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나 안 보나 신경을 쓰느라 예배를 드리다가도 거울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느라면 '별로 볼만한 얼굴도 아닌데 무얼 저리도 거울을 보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과 악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악수를 할 때 꽉 잡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이 전부 수평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수직적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수직적 관계는 극대화하고, 수평적 관계는 극소화하는, 그런 관계를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래 경건이라는 것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누가는 이 '경건'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단이었습니다. 아주 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경건한 사람이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전제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찬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한 데에 대단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운다'라는 말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울음이 있습니다. 요11장을 보십시오. 뒤에 다시 살아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물론 우리는 소망도 있고, 영생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정이 끊어지고,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이제는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왜 우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눈물을 흘리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으니까요.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알건 모르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울음에 대한 휴머니즘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 젊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할일 많은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이렇듯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울음은 길게 울어서는 안 되는 울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울음 자체에 대하여 한번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 울었을까?'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고 있는 저들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여기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은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고귀한 죽음을 맞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란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순교도 기회가 와야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순교사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깨끗한 순교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잘못 휘말려서 죽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스데반 같은, 그렇듯 깨끗한 순교는 하나의 지고하게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들 앞에서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천사의 얼굴로 돌에 맞아 죽는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울어야 하겠습니까? 찬송을 드려야지요. 좀 더 나아가 부끄러워해야지요. 그와 같이 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스데반과 같이 못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모두 스데반의 순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를 갈고 있는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보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을 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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