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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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1.

대통령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고 늘 겸손한 자세로 나라를 이끌어가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되게 하소서

2.

이 땅의 위정자들이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이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인정하게 하소서

3.

이념, 지역,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사라지게하시고 소통과 화합을 통해 분열된 국론이 하나 되게 하소서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1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에 뒤따르는 구속사적 말씀입니다. 이후에 선교의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지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선교의 무대가 바뀌는 전환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 복음이 그 중심부에서부터 지정학적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사마리아로 가는 선교의 전환점을, 선교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에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안주하려고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사람들끼리만 예수 믿느라 이방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당부의 말씀도 저들은 실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좀 전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교회사를 연구해보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럽의 나라들 전부가 자기 사는 마을, 자기 사는 도시, 자기 사는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민족 종교로서 입니다. 유럽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가 많습니다. 국교로 정했다는 것은 그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독일을 보십시오.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뒤 독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습니다마는, 그 역시 선교를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루터의 신학에는 선교가 없습니다. 내 민족, 내 나라만을 생각했습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네바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영국은 영국대로, 로마는 로마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저마다 자기들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 안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했습니다. '이 나라를 진정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상 세계로 만들어보리라'하는 데에 집착하여 다른 나라 사람을 구하고,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이 바로 주님 계시던 곳이요, 주님 승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천사들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행 1:11)"라고 말씀했거든요.

따라서 저들은 '반드시 저 감람산에 주님 다시 오실 것이다' 전제하고 우리끼리만 열심히 믿고, 우리끼리만 전도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아야 되겠다는 생각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생각이 협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선교적 동기가 참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새삼 신앙적 지식이 높아지고 선교적 정열이 생겨서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서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라고 저들 스스로가 생각을 바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로 가게 되었습니까? 본문은 이에 대하여 아주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합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절)"

박해 때문에, 핍박 때문에 더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죽게 생겼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는 수없이 사마리아로 피해간 것입니다. 사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유대 나라는 남북 왕국으로 나뉘어져서 북쪽 열 지파는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고, 나머지 두 지파는 다윗 왕조를 계승하는 유대 왕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북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그들은 즉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앗수르에게 멸망 당하면서 잡혼을 강요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인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은 당했어도 혈통의 순수성은 유지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천대하고 무시했으며 심지어 상종치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난을 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당한 핍박은 복음을 전 세계로 퍼지게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심한 박해가 수만 명의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이곳 저곳으로 흩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민들레 씨앗은 사방으로 날라 갑니다. 핍박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소아시아 전역으로 흩어 놓은 바람이었습니다. 특히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마저 포기하고 늘러 앉아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서둘러 짐을 꾸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성령 충만, 예수 충만한 그들이 흩어지자 무슨 생각을 하였습니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되지 않는데. 왜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허락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로 보내셨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하나님의 선교전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은 우리의 생각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선교 사업을 하고, 어떤 학교를 세우고 하는 우리의 선교전략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지금 저들은 박해에 쫓겨서, 핍박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이로써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핍박과 흩어짐, 그것은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최악의 것에서 최선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에서 소망을 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좌절로부터 축복을 끌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좌절을 축복으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실패,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하는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해석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사도행전적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대단히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6. 25를 통해 사방으로 흩으셨습니다. 정말 민족 전체가 겼었던 고난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만큼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난 많은 혼란과 어려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이민 역사상 우리 민족만큼 교회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중국 사람은 가는 곳마다 식당을 하고, 일본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사업을 일으키고,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세우고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흩으셔서 전 세계가 복 받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난을 보면 고난은 고난이 아니고 핍박은 핍박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하나님이 더 놀라운 역사와 섭리를 이루시는 계기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핍박이 온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이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힘 있게, 능력 있게 교회를 확장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박해를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요, 하나님의 손짓이요, 하나님 나라의 개척이요 창조라는 것입니다.

흩어짐보다 더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우리는 여기서 왕국을 짓고 주님 오실 때까지 편안하게 살자’ 이것처럼 나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안주하려는 사람을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편안하게 지내려는 사람은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더 놀라운 축복과 미래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흩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교전략은 박해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본문은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울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의 옛 모습을 구태여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렇게도 악하고 이렇게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평생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생각하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숨김없이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는 물론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도 사울은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 행위는 단순한 우연적 행위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불끈해서 칼로 찔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지불식간에 감정이 폭발해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꼭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합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율법적으로 당연히 그리해야 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들만 남고는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니 사도들만 용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직접신앙과 간접신앙 -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당장에 죽는다 해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들어서 믿은 사람들의 신앙은 간접신앙입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신앙이기에 핍박이 따르자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신앙을 가진 자와 체험한 자로부터 들어서 믿는 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직접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용기가 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은, 비굴하게 도망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핍박으로 말미암아 재산과 가족을 다 잃어버린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핍박 때문에 도망간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은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 남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책임지고 사도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원래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먼저 순교 당하지 않고 스데반이 첫번으로 순교 당했습니까? 당시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지성인 축에 드는 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들의 공격 목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유대인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은 핍박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래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은 순교 당했습니다. 이로써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2023년 7월 29일 오전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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