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찬송가
Hymn찬송가 316장 주여 나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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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가정마다 예배와 기도가 멈추지 않으며 사랑의 언어로 서로를 축복하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의 모든 관계가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소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바르게 양육하는 성경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되게 하소서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59-60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 본문말씀은 스데반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순교 장면을 보여줍니다. 보시다시피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동시에 참 순교의 표본입니다.
참 순교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습니다. 결코 억울하게 죽는 것 같은 모습으로 죽지 않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이라야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교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야 대표적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마땅히 이렇게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디 죽는 준비를 잘 합시다. 병원의 의사선생님들은 특별히 죽음을 많이 봅니다. 그런 의사선생님들이 고백하는 것을 보면 딱히 통계를 낼 수는 없으나마 대체로 기독교인들이 아름답게 죽는 편인데, 간혹 보면 직분이 있는 교인인데도 마지막 장면에서 영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유감스러운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원망해서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왜 안 들어주시나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듯 안타깝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 생명을 연장해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필경에는 원망에서 감사로 돌아가서 죽어야 되는데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원망하는 그대로 죽고 마니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감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잘 죽어야 합니다. 살았을 때 아무리 아름다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임종 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스데반처럼 예수 닮은 죽음을 죽어야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스데만처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령 충만 받으면 됩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박효진 장로 (서울 구치소) 간증 : 사형수 가운데 부처라는 분이 있었고, 구원을 받긴 했으나 걱정스러운 형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을 당하던 날의 모습을 보니 너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불리던 분, 평소에 그렇게 화도 내지 않고 큰소리 한번 치지 않았던 그가 끌려가던 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며 질질 끌려가는데 바지에 똥을 싸가며 죽음을 두려워하여 끌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형제는 담담하게 스스로 자기 발로 사형장에 가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자들에게 사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사형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에 순교하는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두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입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믿음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살기 위해 비겁해 집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자기의 영혼을 의탁하는,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똑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무릎을 꿇고(60절)"라 합니다. 처음부터 꿇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뭇 돌에 맞았습니다. 이미 육신이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 구나' 싶은 순간, 끝이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에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순간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쉬운 일입니까? 돌무더기 속에서 지금 엉망이 된 육신에 정신은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닥 남은 정신마저 가물가물 사라져갑니다. 이러한 순간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기도 없이 끝낼 수는 없다'-이래서 몸을 가누어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군중의 고함과 어지러이 날아드는 돌 세례의 와중에서 스데반은 가까스로 경건한 자세를 취하였고, 그리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더할 수 없이 귀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임종을 맞이할 때에도 그냥 누워서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름지기 바른 자세는 무릎 꿇은 자세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릎 꿇고 드리는 스데반의 기도는 간단합니다. 긴 이야기가 없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나서 그 와중에도 원수 위한 기도까지 잊지 않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고 있었습니다. 미움과 분노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최고봉은 원수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원수를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라”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못하겠습니다. “원수를 포기하라” 그러면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인간 안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안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스데반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도덕, 윤리, 선행, 철학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4장 16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봅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사도 바울의 임종기도와 같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인데, 자기를 핍박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씀합니다.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
여기에는 깊은 뜻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저들의 죄를 사할 권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말의 숨은 의미는 일이 이렇게 된 데는 그 잘못이 나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내 실수로 인하여 저들이 저렇듯 화를 내게 됐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면 그 누구에게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다음 말은 없습니다.
곧 그 허물을 나에게 돌려주십사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할 때에 무작정 '용서해주십시오' '사해주십시오' 하는데 누가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그 원인이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나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이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완전한 것이었기에 후회가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만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계시거든요. 지금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죄를 위한 기도를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대단히 깊은 신학적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끝에 보니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60기독교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지만 스데반은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요히 잠이 든 것입니다. 왜요? 주님 오실 때에 부활할 것이니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15:51-52"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양으로 죽었든지 자유롭습니다. 성도의 죽음을 가리켜 피살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사고사라 해도 안됩니다. 성도의 죽음은 어느 때에 어떻게 죽더라도 죽음이 아니요 잠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가는 것이요, 그리고 잠드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망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는데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11:11-14스데반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집사였다는 사실입니다. 평신도로서 기독교 사상 첫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가 받을 첫 영광의 면류관을 사도들이나 성직자에게 주시기 않고 평신도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평신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주를 위해 충성하는 일에는 늘 제 이선에 서기를 좋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스데반에게서 여러분이 반드시 배워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주의 종만 증거해야 한다. 그런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이방인에게 가서 제일 처음 성회를 열었던 자가 빌립 집사, 사마리아 대 복음 성회를 인도한 것도 빌립 집사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첫 순교자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교회 성장에 집사가 행한 공은 큽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딤전3:13성경에는 여기에 영수나 장로가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사 스데반과 집사 빌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초를 피로 인치고 복음으로 세운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피와 그의 임종 기도는 위대한 선교사 바울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사도 바울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순교의 피는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기도는 절대로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누리는 놀라운 부흥은 반드시 이유가 있는 부흥입니다. 뿌려진 씨앗이 썩지 않는 곳에 어찌 풍성한 열매가 있을 수 있습니까? 틀림없이 한국 교회의 부흥은 지난 100년간 이 땅에 뿌려진 순교자의 피가 가져다 준 축복인 것입니다.
핍박을 한다고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된 것은 바울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이 아니었으면 기독교 신학이 이렇게 정립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가장 많이 핍박한 자가 변화되니까 가장 위대한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주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2023년 7월 28일 오전 6: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