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0

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환경과 생명을 위하여

1.

온 인류가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질서대로 환경을 다스리게 하소서

2.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낙태와 아동 학대 등 생명 경시 풍조가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3.

환경과 생명을 위해 일하는 관계자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효율적인 정책이 세워지게 하시고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7:56-58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행7:56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거룩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거룩의 경험을 못합니다.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죄악의 경험입니다. 끊임없는 죄 의식, 좌절감, 깊은 죄의 뿌리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실패의 경험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좌절의 경험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거절 받는 경험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열등감의 경험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비참한 경험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묵상하기보다 자신을 많이 묵상합니다. 패배감을 많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런 인간이 거룩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천지개벽할 일대 사건입니다. 내 안에 거룩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룩은 내 안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거룩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영광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영광 깊은 곳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깊은 곳에는 어린 양 예수가 계십니다. 이것은 마치 반지에 끼어 있는 보석과 같습니다.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영광의 빛이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빛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그 빛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그냥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출정식이라고 마치고 막 떠나려는 듯한 그런 동작을 취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서 계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스데반이 순교하려는 바로 그 상황, 모든 사람이 이를 갈고 있는 그 상황에서 그대로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121편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주무시거나 졸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승천하신 이후에 지상의 모든 사역이 끝났으므로 안식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한 번도 쉬는 일이 없으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고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스데반은 자기가 목격한 것을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세상의 것이 시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영광에 집착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이런 발언에 대해 이를 갈며 미워하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7:57-58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야 했던 것은 성령이 그들의 양심을 찔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영혼을 강타했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듣지 않으려고, 들으면 양심이 가책을 받으니까 귀를 막아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에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만있어 보라, 내가 말하지 하고, 자기 말만 하려들지 남의 말을 듣는 자세는 전혀 없습니다. 싸울 때에 '당신 말하시오. 나 듣겠소' 한다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듣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인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경청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 또한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였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 당부한 말이 ‘경청’이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사55:3

우리는 마음의 귀를 열어서 들어야 합니다. 마음의 귀를 열면 들려지고 듣다보면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 악의에 찬 사람은 막바지에 이르러 으레 귀를 막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끝인 것입니다.

귀를 막았을 뿐 아니라 저들은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군중심리입니다. 집단화한 것입니다. 악의가 집단화할 때에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행동화하여 우 달려듭니다.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게 됩니다. 이 순간은 전혀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정부만이 집행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도 이런 것마저 가리지 못하게 됩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린 나머지 저들이 지금 여기서 돌을 던지면 스스로들 로마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만큼 대중이 없어집니다. 법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돌아올 불이익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너 죽고 나 죽어도 좋다는 발악입니다. 저들은 그런 심사로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는 어쨌든 정당한 방법을 억지로라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은 그것도 아닙니다. 억지 구실도, 억지 재판도 없이 그대로 성 밖에 끌고 가서 돌로 치는 것입니다. 저들의 악이 극치로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해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나 제자들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도 옛날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강도나 깡패한테 맞아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7장 전체를 통해서 기나긴 설교를 합니다. 저들은 그 설교를 다 듣고 나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말씀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복음을 못 들어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건 듣는 현장에서 마음 문을 열지 못할 때에는 악의에 찬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도 한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구원의 계기가 되고, 한 사람에게는 멸망의 계기가 됩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이 교회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교회를 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절에서 우리는 스데반과 사울의 절묘한 만남을 보게 됩니다. 당시 청년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악한 무리들이 예수쟁이라는 생각이 청년 사울에게 얼마나 강했던지, 그는 스스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그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 넣으려는 그런 열심히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분명 스데반의 죽음에 흔쾌히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며 박장대소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스데반과 사울의 첫 번째 만남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울은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로 바뀝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의 시작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죽음을 보면서 사울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울의 출발은 스데반입니다.

여러분이 억울하게 당한 채, 손해를 보고 세상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어쩌면 그렇게 고난 당하고, 무시 당하고 손해보고 패배를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며 죽어가는 것이 사도 바울을 잉태하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위대한 바울을 탄생케 했던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에는 볼 수 있는 열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애에 나타나지 않는 열매도 있습니다. 아무 뜻도 없이 무의미하게 손해보고 일생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023년 7월 27일 오전 6:44

Archive

지난 말씀 보기

지나간 날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세요. 날짜를 선택하면 해당 날짜의 설교로 이동합니다.

전체 목록 보기

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