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 스페인 복음화와 아프리카 선교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목회자와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기적이 일상화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행7:8-10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행7:8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구분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에 포피를 베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할례를 받아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할례를 받는 일, 즉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종종 구원받는 데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야만 구원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행위는 우리가 믿고 난 뒤에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관차와 객차의 관계와 같습니다. 기차는 기관차만 있으면 달려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기관차에 해당되는 믿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관차가 뒤에 객차를 달아 많은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객차에 해당되는 행위를 통해 많은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상급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상급 받는 주님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서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행7:9-10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금 순교 직전의 스데반,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성령이 충만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는 그를 노려보는 악한 사람들의 살기 등등 한 시선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저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삼엄한 시간, 생명이 경각에 묶여 있는 시간입니다 마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그것이었습니다. 천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하게, 조리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들어 증거 하는 내용의 주제는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와 그 십자가에 대하여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구속사적인 사건,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스데반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거룩한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이 죄인인 양 고난을 당하는 역사가 있어지고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때로는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가리켜서 흔히 '만인균형의 법칙'이라고들 합니다. 죄인이 살기 위해서는 의인이 죽어야 하는 모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이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대접 받는 것은, 또 죄인이 의인으로 구원받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죄인은 죄인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죄인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있어야 할 일이 있으니 곧 의인이 죄인처럼 죽어 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중요한 교리인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이 죄인인 양 고통 당하고 죽어 가는 사건이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다는 사건이 확실하다면 죄인이 의인처럼 산다는 것도 확실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 같은 건 구제불능이지, 쓸만한 데는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 의심이 되십니까? 변증법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이 죄인인 것처럼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똑바로 알면 죄인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하고 고상하신 뜻을 인간의 죄나 인간의 불의에 상관없이 신비롭고도 초월적으로 변함없이 계속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렇듯 중요한 테마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가는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2 아들 중 막내로부터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이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이 낳았으므로 남달리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질투를 합니다. 질투가 나서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사람들의 기록에 보면 '당나귀와 노예는 꼭 같은데, 다만 노예는 말을 하고 당나귀는 말을 못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노예였습니다. 짐승과 동격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말하는 짐승'이 곧 노예였던 것입니다. 한번 노예는 그 후손까지 대를 이어 노예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린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서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결코 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떠나 가시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결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떠나시니 망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은 그렇게 대적이 많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다 극복하고 승리했던 것입니다. 요셉 또한 어려움이 숱하게 많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니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보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형들이 나를 팔았다. 나는 망했다. 끝장났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 서 하나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45:5형들은 분명히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시간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팔려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셔서 여기에 왔다'라고. 'be sold'와 'be sent'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팔려왔습니까, 보냄을 받았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여자가 시집을 갔습니다. 알고 보니 잘못 갔어요. 가서보니 고생 죽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어느 직장에 몸담고 있건 어디 가서 살 건, 어떤 일을 맡았건, 사람으로 볼 때에는 팔려 다닌 것 같아도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식입니다. 나의 나됨은 결코 팔려온 것도 팔려 다닌 것도 아닙니다. 우연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셔서 나의 나됨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be sold'냐 'be sent'냐, 팔렸느냐 보냄 받았느냐 -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죄악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본문이 말씀해주는 소중한 은혜입니다.
흔히들 요셉을 설명할 때에 그리스도의 예표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리스도의 모델이다, 하고들 이야기합니다. 구약적으로 볼 때에 요셉은 확실히 그리스도적인 모습이 있는 인물이라고 보여집니다. 그의 사건도 그러합니다.「팡세」를 남긴 프랑스 신학자 파스칼도 예수 그리스도와 요셉 사이에 유사성이 많다고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도 요셉도 둘 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제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비슷하지요.
둘째, 요셉도 죄 없이 팔립니다. 억울하게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지요. 요셉은 은 20에 팔립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립니다. 건강한 노예, 장성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은 30이었습니다. 요셉이 팔릴 때에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싼값에 팔린 것이지요. '조금 키워야 써먹으니까' 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 20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요셉은 같은 값에 팔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요셉은 감옥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그들이었습니다. 두 죄수 사이에 있다가 한 사람은 감옥에서 나가게 될 거라고 예언하게 되고 한 사람은 죽을 거라고 예언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두 강도 사이에 계셨습니다. 하나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셔서 구원받고 한 사람은 버려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도 이렇듯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셉의 사건에서 보면 요셉의 형들이 이렇듯 악할 수 있는 것일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인간의 죄를 말해주는 극적 장면이거든요.
아시는 대로 우리 인류역사에서 맨 처음에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그야 선악과를 따먹은 죄이지만, 에덴동산 밖에서 지은 죄가 바로 형이 동생을 쳐 죽이는 죄입니다.
왜 죽입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이 형에게 그 무슨 해로운 짓을 했습니까? 무엇을 빼앗았습니까? 강도질을 했습니까? 욕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질투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샛말로 '컴플렉스' 때문입니다. 열등의식(inferiority)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해놓고 공연히 동생을 죽이고 앉았단 말이예요. 이것이 곧 인류가 범한바 아주 태고 적부터 있었던 죄인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아니고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느냐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든 죄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는 반드시 시기, 질투가 있습니다.
시기, 질투 -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문제에서 시기, 질투만 빼버리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되 이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를 하는 동안은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어지러워요. 괴로워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요. 얼굴을 펼 수가 없어요. 밝은 총명도 없어지고 지혜도 없어져요.
한번 시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시기는 피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비롯됩니다. 내가 부족한데, 저 사람도 함께 무너져야 되겠는데, 그렇게 안돼요. 그럴 때에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내 실패인 양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이 곧 자기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해요. 이래서 시기 질투가 생기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뿌리 박혀 있어서 폭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안보이고, 도덕도 안보이고, 생명도 안보이고, 필경에는 나도 죽어요. 스스로도 자기 죽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도 상관하지 않아요.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다 죽어버리자는 것이지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 중 가장 뿌리깊은 죄가 시기인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고사하고 우선 내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조금만이라도 생기거든 회개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기, 질투로부터 깨끗이 자유라는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번은 어느 권사님이 아들 장가를 보내는데, 장가를 보내 가지고 내보내려고 해요. 권사님은 내보내려고 하는데 남편 되는 장로님은 며느리를 데리고 있으려 해요. 이래서 말다툼이 났어요. 그러다가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더니 판결해주기를 "내보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이 되게 좋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겼다'고. 담임목사님이 하라는 대로하기로 했답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데 왜 그랬소?"하고 물어보았더니, 아직 결혼하기 전 약혼하고 있을 때에 신부 되는 처녀가 신랑 댁에 놀러 갔답니다. 차를 끓여 가지고, 또 과일을 예쁘게 깎아 가지고 시아버지한테 가지고 가서는 "아버님"하고 대접을 했대요. 이 시아버지가 그만 입이 함박같이 벌어져 가지고 좋아하는데, 이 광경을 본 권사님의 마음에 질투가 오더랍니다. 아하, 이 영감이 젊은 여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꿈틀거리더니 당장에 그 아가씨가 나쁘게 보이더랍니다. '요것, 요부다, 안되겠구나' - 이래서 시어머니는 '안되겠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해서 내보내자 하니 장로님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담임목사님한테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질투란 같은 또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질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썽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질투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질투합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질투하는 게 아닙니다. 보십시오. 형들이 요셉을 질투합니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이 말입니다.
결국은 동생을 팔아버려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질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니 이것을 못 참는 것이었습니다. 질투, 시기지요.
질투, 시기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서 꿈틀거리는 이 시기, 질투를 예사로 생각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어느 사이에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셉은 그 부조리한 형편 중에도, 있을 수 없는 사건 속에서도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끝까지 성실했습니다.
2023년 7월 13일 오전 5: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