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담임목사를 위하여
말씀의 은사를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영적인 민감성을 주사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을 내리게 하시고 성숙한 리더십과 사랑으로 모든 성도를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하소서
목사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온전히 사역에 집중 할 수 있도록 환경과 여건을 허락하여 주시고 가정에 평안을 주소서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행7:5-7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현장에서 주시지 아니하고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현금으로 주지 않고 어음으로 주신 것입니다. 약속어음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각에 가서야 돈입니다. 현재는 돈이 아닙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어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당장 돈을 주시고 자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부귀영화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약속이었습니다. 축복이 약속으로 온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어야지요.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땅이요 자식이었습니다. 땅을 주겠다, 자식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본문에도 나타난 것처럼 우선 발 붙일만큼의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일생을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다 갑니다.
다음으로 자식의 문제인데, 자식을 주신다고 했으면 당장 주시지 아니하고 성경을 보면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주십니다. 말이 25년이지 이것 기다리기가 쉽습니까?
그러면 다시 말씀 드립니다. 미래가 현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와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시각과의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이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건이 사건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당장 주시지 아니하고 이렇듯 미래에 주시는 것일까요? 준비해야 될 것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키워야 하고, 아브라함의 의식도 아브라함의 철학도 아브라함의 세계관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후에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또 엄격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속에 대해서 좀 생각해봅시다. 약속은 확실히 미래적인 것입니다. 수평적인 약속이 있고 수직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나와 너,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약속하는 것은 수평적인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로 약속하는 것과 같이 수직적으로 약속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유언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보고 하는 약속입니다. 약속이라기보다는 명령입니다.
요즘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결혼했다가도 이혼하고 합니다. 약속이 파기되고 버려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속도 이렇게 파기됩니다. 해약됩니다. 그러나 도무지 해약할 수 없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언입니다. 유언한 자가 세상에 없는데 어떻게 해약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수직적인 약속입니다. 해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고향 떠나겠느냐? 떠나려면 떠나라, 동으로 가겠느냐 서로 가겠느냐? - 이렇게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가라, 주리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일방적이지요. 유언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라, 안 믿으면 내 자식이 아니다, 그러고 눈감으면 그만입니다. 그게 유언입니다. 이것을 나는 '그거 취소합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어서 효력을 발합니다. 히브리서 9장 16, 17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사실입니다. 죽음으로 sign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갑니다.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는데 상대방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무효입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지키는 자에게만 약속의 효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발효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약속으로 말미암은 모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도 못하고, 이 약속을 따르지도 못하고, 이 약속을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상관없게 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많은 생각 끝에 이 약속을 수평적 약속이 아닌 수직적 약속을 '디아데케이'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estament가됩니다. Testament와 promise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promise는 일반적인 약속입니다. Testament는 말 그대로 유언이라는 뜻입니다. Last word입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 낱말이 '브리트'입니다. 약속, 언약을 말할 때에는 '카라트 브리트'라고 쓰인 경우가 단연코 많습니다. '카라트'는 자른다, 쪼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잡아다 놓고 반을 딱 쪼갠 뒤에 그 갈라놓은 사이로 두 나라의 대표가 지나가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여기에는 이 약속을 어느 한쪽이 어기게 된다면 짐승을 갈라놓은 것처럼 갈라놓을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절대로 깨서는 안됩니다.
그런 뜻으로 이러한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 비슷한 상징이 창세기 15장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약속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을 네가 믿고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혜택이 그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절)"라고, 약속과 함께 혜택을 보증해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약속을 지키면 네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여러 차례 이러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도,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을 때에도, 특별히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 앞에 이삭을 바칠 때에도 이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이냐, 그 말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일생 전부가 믿음 그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적 믿음을,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받아들이기가 힘든 말씀일지라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인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4:18-22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옳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렇게 율법적으로, 양심적으로 깨끗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순종입니다. 확신이 아닙니다.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고, 가라고 하시면 갑니다. 다시 돌아 오라 하시면 "예"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버려라 하시면 버립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왜입니까?" 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 순종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오래 오래 기다립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소망적이요 미래적입니다. 당장 받은 것은 얼마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먼 미래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보다 먼 미래, 그에게는 이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땅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사라가 단산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것을 믿고 25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들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은 참 너무하셔,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너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은 '아멘' 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니 떠났습니다. 철저히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때로는 떠나라는 말씀 속에 모험이 있습니다. 그는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주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사방에 블레셋 사람이 있고 애굽사람이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엄청난 모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감행했습니다.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고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그는 조급하게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오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내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먼 훗날에, 나 죽은 다음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롬4:9"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3:6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아브라함의 불신과 잘못과 휘청거렸던 일을 다 용서해주십니다. 나아가 의롭다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이 들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참된 믿음을 꿰뚫어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논조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넘어가서 이것이 바울 신앙의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아브라함의 믿음 그대로가 크리스찬의 신앙 모델이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지 궁금하거든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 약속을 믿고, 나그네 생활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끝까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