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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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청년 세대들을 위하여

1.

이 땅의 청년들이 세상의 야망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한 비젼을 품고 그 비젼을 향하여 전진하게 하소서

2.

개인과 가정,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청년들이 되게 하소서

3.

성적 타락 및 각종 중독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켜 주셔서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친히 인도하여 주소서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6:1-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행6:1

초대 교회는 급성장했습니다. 12명이 120명으로, 120명이 3,000명, 5,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5:14

수를 셀 수가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라고 날로 부흥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부흥하는 초대 교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 부흥하는 교회나 부흥하지 않는 교회나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과제일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원망'이 문제로 드러나 있습니다. 구제로 인하여 원망이 생긴 것입니다. 누가 원망을 했습니까? 헬라파 유대인들이

무엇 때문에 원망을 했습니까?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두 부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로마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사람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요, 문화적으로는 헬라입니다. 헬라문화가 지배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정치 하에 안정을 누리고 살지만 문화적 철학적 언어적으로는 헬라문화권에서 삽니다.

그래서 성경도 히브리말로 읽지 않고, 칠십인역(Septuagint)이라고 헬라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습니다. 히브리말은 잘 모르니까요. 그저 가끔 쓰는 몇 가지 일상용어나 쉬운 히브리말은 구사할 수 있어도 소위 academic language로 사용하는, 학문적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헬라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헬라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로마정치에 대하여도 상당히 유연합니다. 요샛말로 하면 이 헬라파 유대인은 개혁파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히브리사람으로 히브리종교에 충성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대표적인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히브리파 사람'은 해외에 나가지 않고 본국에서 삽니다. 본국에 살면서 아람어를 사용하고, 전통적으로 유대사람들의 율법에 대하여 엄격하고 고집스럽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보수파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풍습에 대해서까지 그렇습니다. 또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데에 아주 보수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이 아니라 그 신앙의 문화화한 것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보수적 개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같은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하여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이 두 문화권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헬라파 유대인인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구제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할 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구제를 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언제나 비 영적인 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구제사업이 문제입니다. 구제를 해야만 하지만 구제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구제에서 무엇이 문제가 된 것입니까? 분배가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 보다도 공평해야 할 교회가 공평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의 과부가 그 매일 구제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끼리도 죽을 때에는 저 죽을 곳을 찾아가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헬라파 유대인들도 멀리 나가 살다가 나이 많아 노인이 되면 고향인 예루살렘에 와서 죽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비용을 준비해 가지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예루살렘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됩니다. 그러면 돈이 모자라게 됩니다. 결국은 구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이것은 보통 구제가 아닙니다. 매일의 구제입니다.

원래 금요일이 되면 유대사람들은 모금을 합니다. 북을 치고 그릇을 가지고 다니면서 구제를 위하여 모금을 합니다. 죽 돌아다니면서 모금을 해 가지고 저녁에 이것을 나누어줍니다. 이렇듯 모금한 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구제를 매일 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는 매일구제를 하는데 넉넉하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날에 필요한 것만큼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일구제의 관습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딤전5:1-16을 보면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부'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과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디모데전서로 돌아가 봅시다. 디모데전서는 어떤 과부가 참과부인지를, 또 참과부가 교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 열락 같은 것에는 미련이 없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 늘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사는 사람이 참과부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친척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이 있다면 당연히 그들에게 효도를 받아야지 교회의 구제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친척들이, 자녀들이 없는 사람만이 참과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한 번만 시집을 갔던 사람이라야 참과부라고 합니다. 한 번 시집갔다가 남편이 죽었다고 다시 가고 했던 사람은 또 시집갈 소질이 다분하기에 참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사람만이 참과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봉사정신이 있어야 참과부입니다. 남의 발을 씻길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철저하게 남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대접받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남은 생을 오로지 봉사하는 데에 깨끗이 바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참과부입니다.

그리고, 60세 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젊은 과부는 다시 시집을 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과부들은 '참과부'로 교회명부에 올려서 매일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부들은 교회에서 그 생활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들은 온전히 교회에 봉사하고 기도하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그 들을 구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세요. 교회에서 과부들을 명부에 올려 구제하는 데에 몇몇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빠졌던가봅니다. 이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세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원망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주는 자는 원망이 없습니다. 받는 자에게 원망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이 집을 위하여, 이 식구들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겠노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 바라는 척하면서 바랍니다. 여기에서 원망이 비롯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받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100퍼센트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바치려고만 하는 사람은, 주려고만 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주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보세요. 저들은 과부에게 구제하는 것을 받으면서 왜 누구는 주고 누구는 빠뜨리느냐 하고 말이 많았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커지면 본질적인 것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전도하지 못하고, 선교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문제에 봉착한 사도들은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겼는데, 어찌 원망하느냐고 질책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6:2-4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로 얼마나 바빴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처 놓고 구제에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면 빨리 수정을 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자존심 상해 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실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잘못을 빨리 바꿔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한 가지 사항은 교회의 진정한 영적 부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느냐는 것입니다. 부흥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말씀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하게 하는 데서 나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교회 행정이나 사역 뒷바라지에 세월을 다 보냅니다. 너무나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임 교역자들이니 사역자들이 그렇게 하면 교회는 부흥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질 뿐입니다. 행정적으로, 조직적으로는 교회가 잘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목회자들이 기도하는 것에 시간을 쓰는 데서 비롯됩니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하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목회자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설교하고, 성경 연구하는데 전념하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제자들의 역할, 성도들의 역할을 잘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목회자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가지 아니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은 택하여 하나님의 일을 분담하도록 제도와 조직을 바꾼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가 좋으면 교회가 부흥하고, 심방을 잘하면 교회 내에 사랑이 생기고, 교육과 성경 공부를 잘하면 교인들의 영적 지식이 놓아지고, 행정이 좋으면 교회가 편안하다.’

즉, 행정을 잘하니 서로 부딪히고 시끄러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바로 이러한 요소를 갖추게 됩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비본질적인 일에 너무 바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일곱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2023년 7월 5일 오전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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