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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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우리 교회를 위하여

1.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 지역 사회의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게 하소서

2.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가 기도와 예배의 영성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복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3.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소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5:38-4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행5:38-39

비록 이 사람들이 복음으로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다고 할지라도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주동자 예수가 죽음으로 무너지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면 사람이 결코 무너뜨릴 수가 없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통하여 가말리엘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5절)."

이 말의 내용인즉 상관하지 말자,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면 막을 길이 없을 것이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 아니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없어질 때가 되었으나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사회적인 악을 막기 위하여 사형이라는 처형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 말하면 그 누구에게도 사람을 살리고 죽일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한다고 해봐야 얼마 뒤에 생각해보면 잘못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사도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런 판단을 섣불리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가말리엘이 만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면 됐지, 그 제자까지 죽이려고 하느냐, 한 번으로 족하다 라고 만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 겸손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지혜입니다. 내가 누군데 남을 심판합니까?

우리는 재판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경우에 재판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때에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고 실컷 떠들어놨는데 나중에 보니 좋은 사람입니다. 아차 합니다마는 이미 늦었습니다. 얼마나 큰 실수입니까? 그 때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을 왜 말을 해버렸던가, 하고 얼마나 후회를 합니까? 그러므로 가말리엘은 말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참으로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세 번째로 가말리엘은 지금 저들이 무척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흥분된 가운데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피해의식에 매여 일을 처리하면 더욱 큰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자 살리자 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잘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짓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의 되어지는 사건을 보니 정말로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회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가책의식이 역작용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없이하겠노라 하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죽는데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사울은 제대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스데반은 의인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하는 생각이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의인이면 사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인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갈등 때문에 절반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야 다메섹까지 왜 가려 했겠습니까? 다메섹까지 피난간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겠다고 하는 극악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심리적으로 그 마음속에 내가 한 일이 잘못이었다고 하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작용으로 나타나서 더욱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없애버리려고,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또 살인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인 데에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정면으로 저들의 가슴을 찌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처럼 극악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지금 객관적 진리에 의하여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재판은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들의 피해의식에 의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흥분적인 재판이요, 전혀 냉정함이 없는 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냉정을 잃어버리면 법은 무너지고 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그 재판은 잘못되고 맙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가말리엘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처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아라'하고 저들에게 충고합니다. 저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냉정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옳다 그르다 하고 그 당장에 다툴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만 자고 내일 다시 만납시다,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 좀 더 기도해보고 결론을 냅시다'하고 흥분을 가라앉힐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버리는 순간, 진리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흥분을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 흥분된 자세가 문제입니다. 이 피해의식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 가말리엘은 '냉정하십시다. 지금은 냉정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말리엘은 저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가질 것을 권유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과거에 되어졌던 일들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이렇게 흥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받아들임으로 베드로와 사도들이 풀려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0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은 사람들은 그 권위와 존경 때문에 그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한 바리새인, 한 지성인의 도움으로 사도들은 결국 풀려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들과 베드로가 이 자유를 어떻게 해석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1

사도들은 감옥에서 나온 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풀려나서 그들이 기뻐한 것이 아니었고,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이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감옥이냐 감옥이 아니냐가 아니었습니다. 핍박이냐 핍박이 아니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내가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 이름보다 더 귀한 이름은 없고, 예수 이름보다 더 능력 있는 이름 또한 없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름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특징은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고난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혹은 예수님 때문에 모함도 받아 보지 못하고, 오해도 받아 보지 못하고, 손해 본 일도 없다면 그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뜻은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댓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대가를 치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기적으로 대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대가를 치르는 일이 없이 어찌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고난 받기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 거친 일,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지배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 오해도 받아 보고, 속도 상해보고,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 보았자 예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12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3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5:42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신앙이란 집에서 구역 모임을 통하여 전도하고 가르치고, 성전에서 가지는 예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희돈 장로님의 삶의 목적 - 무역을 통한 세계 선교

그렇게 살아가는 장로님을 하나님이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

저는 그런 일이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 그리고 이 교회에서 계속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기름 부음을 받은 종, 참 하나님의 아들, 우리들의 참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 분이야말로 나의 구세주요, 나의 주님이시다.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이 고백을 할 때까지 전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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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