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기도 동성애를 두고 기도합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문화적 기류가 끊어지게 하시고 이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거짓과 궤변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미디어를 통해 미화되는 동성애의 실체가 드러나게 하시고 다음 세대들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도록 가정과 교회가 더욱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동성애와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막아내게 하시고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는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4:33-37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4:33-35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니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모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결과는 물질로 나타납니다. 은혜를 크게 받으면 하나님께 십일조, 헌물을 드리게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 옷가지 쌀을 모아다 주고, 초상이 나고, 병자가 생기면 유무상통하게 됩니다.
은혜가 없어지면 내 것을 움켜지고, 인사도 안 나누고, 사랑도 안 나누고, 자기 집에는 옷가지가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돈에 대한 자세가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 신앙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돈이 귀해만 보이고, 돈이 하나님보다 더 높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빠지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관념화입니다.
신앙을 관념적으로 가졌을 뿐이지 실생활에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믿고 생각으로만 믿습니다. 아니,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말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말일 뿐이요 믿는 자된 생활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감사합니다'하고 집에 가서는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송을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그 입으로 못된 소리합니다.
믿음 생활을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혹은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삽니다. 실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따로 놉니다. 관념적 신앙입니다.
둘째로, 현실도피적인 종교의식입니다.
이 또한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을 보면 가정생활은 구질구질하고 지옥 같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 좋다고 합니다. 어디 부흥회가 있다 하면 좋다고 참석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이라든지 직장생활이라든지 하는 것은 다 힘들어합니다.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남편 보기 싫고 아내보기 싫고 자식 보기 싫고 만사가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신앙이 크게 병든 것입니다. 현실 도피적인 종교의식, 이것이 문제입니다.
셋째로, 극단적 개인주의입니다. 내 구원 문제만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은 개의치 않습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잘못된 신앙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큰 시험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신령한 세계와 내세 지향적 신앙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의 생활은 무시합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천당만 바라보느라 현재의 가정생활, 물질생활, 직장생활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함정이요 큰 시험거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볼 수 있는바, 초대교회에는 이같이 잘못된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아주 실천적이요 사회적이요 경제적입니다.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물질을 서로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32절)" -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저 사람에게 주고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진다는 것입니다. 내 것, 내 것이 없습니다. 다함께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보십시오. 세계적으로 따져보면 결코 자원이나 농산물이 모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유통이 안될 뿐입니다. 제대로 나누어 쓰지 못할 뿐입니다. 나눔이 없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잉여농산물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습니다. 쌓여서 썩어나가는 잉여농산물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너무 비대해서 걱정이요, 너무 먹어서 걱정이요, 남아돌아서 걱정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이요, 굶어죽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통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물건을 통용할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둘째로, 필요에 따라서 분배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35절)." 이것은 자본주의 이론과는 좀 다릅니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닌, 능력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수고에 따라서, 그 능력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필요에 따라서 분배합니다. 많이 벌건 적게 벌건 쓰는 데는 똑같습니다. 어디까지나 한낱 이론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이론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든 안 하든 온 국민에게 적당한 식량을 줍니다. 그래서 굶는 자가 없습니다. 시민권만 가지고 있으면 국가로부터 반드시 얼마의 양식은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그 월급이요 적게 일해도 그 월급입니다. 똑같이 줍니다. 그러니 일을 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제도를 고쳤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 년 계약으로 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은 올려주고 열심히 안한 사람은 오히려 낮추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생산성이 증대하고 열심히들 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이론'이란 일은 일대로 하고 분배는 필요에 따라서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 좋은 이론입니까? 추운 사람 입히고, 배고픈 사람 먹이고 똑같이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일 안 해도 필요에 따라서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일 안 해도 먹여 주니까 게을러지기만 합니다. 그것이 오래 쌓이다보니 아예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는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는 참으로 이상적인 사회이기는 합니다.
셋째로,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34절)……" 가난한 자, 배고픈 자, 헐벗은 자가 없는 사회 -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입니까? 이렇듯 바람직한 사회가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회라 할 때에 우리는 그 결과만 생각하지, 그것을 이루는 데에 바탕이 된 동력이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잊고 지나갑니다. 그 원인이 더욱 중요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지 못합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공산주의자들이 저들의 이론대로 이상적 사회를 이루기까지는 혁명이 그 기반이 되었습니다. 부르즈와를 숙청해가면서,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숙청은 더욱 무서운 사회를 만들뿐이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제도에 의해서 이러한 사회를 이룩해나갔습니다. 강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과 양심과 자발성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비인간화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빼앗고 죽이고 숙청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습니다. 정확한 통계랄 수는 없지만 소련의 책임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소련은 일 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해나갔다고 합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그 권력 하에서, 그 제도 하에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바른 제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듯 저들은 생각만 있었지 그대로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이상적 사회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룬 아름다운 사회는 인간적인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제도에 의한 것도 아니요 권력에 의한 것도 아니요 힘에 의한 것도 아니요 혁명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 위로부터 온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나아가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바 아름다운 사회는 사도들의 계속적 증거가 따랐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의 믿음으로 이러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계속 말씀을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부활신앙을 증거 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은혜의 세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저들에게 힘을 공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증거 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33절)" -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믿음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보니 내가 가진 물질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님 앞에 가면 죄송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바친 것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4:36-37하나님께 물질을 드린 바나바를 성경에 그 이름까지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1-2물론 우리가 구제할 때에 제일 좋은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바나바가 크게 들어 사용되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바나바가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고넬료 또한 이방인 중에 최초로 구원받은 가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로 심으면 영적으로 크게 들어 쓰십니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22:15-162023년 6월 22일 오전 6: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