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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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기도 세계 선교를 위하여

1.

펜데믹으로 인해 위축된 선교지의 현장을 속히 회복하여 주시고 폭발적인 복음 증거 사역이 일어나게 하소서

2.

선교사님들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영적 분별력을 허락해 주셔서 탁월한 선교 전략으로 접근하게 하시며 모든 질병과 풍토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소서

3.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있는 선교 현장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으셔서 모든 선교사님들이 사명 붙들고 사역하게 하소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막11:1-2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오늘 말씀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에는 굉장히 깊은 진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성공이나 축복,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20:17-19

또 한 가지는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인류의 죽음과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라는 분으로 역사의 한 복판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 있는 어떤 백성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9-14

생명이 왔습니다. 빛이 왔습니다. 구원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핍박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이 인간의 대접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즉위할 때는 온 나라가 떠들썩한 잔치를 베풉니다. 요즘엔 왕이 아니어도 한 사람이 결혼만 해도 굉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만 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누구 하나 잔치를 베풀어주거나 대관식을 베풀어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인류의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을 위한 입성이요, 십자가를 위한 입성인 것입니다. 또한 인류의 메시아요 왕이심을 선포하는 입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 만 왕의 왕, 만주의 주님이신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막11:1-2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미 600여년 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9:9

예수님은 예언된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21:4-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스스로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확실하게 살아가는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2:1에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방에 도착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머무십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유하실 때에 마리아라는 여인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립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의 죽음과 한 여인이 향유를 부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사건을 목격한 가롯 유다는 그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 돈이 있으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굉장히 멋있는 말입니다.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12:7

예수님은 이 여자가 자기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는 그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엄청난 예배였던 것입니다.

감람산에 오셔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두 제자에게 입성을 위한 준비를 시키십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나귀를 데려오라고 하셨을까요? 왕이라면 보통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차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하시면서 나귀새끼 한 마리를 타고 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영적 진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미 나귀가 아니고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마태복음에 없는 사실이 하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나귀는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새끼 나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왕으로 준비해 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예수님의 진정한 겸손을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서 자기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에 화를 냅니다. 많은 교회의 문제는 담임목사인 내게 적어도 이 정도의 고급 차와 이 정도의 넓은 사택은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지어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신 것 만해도 감사한데, 주의 일에 사용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천번 만번 감사해도 부족한 줄 믿습니다.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 그 분에게 어느 누구도 하나님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백 마리의 군마의 행진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얼굴은 열등감에 젖어 있었을까요? 패배감에 젖어 있었을까요? 대접받지 못한 억울함이 그 얼굴에 새겨져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그 참혹한 멸망을 보면서, 불쌍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과 뜨겁고도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사람은 정말 사랑하면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정말 사랑하면 자기 위치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를 계산해보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2023년 1월 26일 오전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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