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신앙고백
Confession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2:19-20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리 마태를 부르시니, 마태가 너무 감사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에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지탄받던 무리들인 마태의 친구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이 식사의 주인공인 마태와 그의 부인도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해서 초청하지 않습니다. 만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한 식탁에서 만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무식한 사람, 유식한 사람, 믿음 있는 사람, 믿음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과거가 복잡한 사람, 과거가 깨끗한 사람, 남녀노소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대 받았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과 격식 없이 대화하며 자유롭게 식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회는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에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면 안됩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며 아름다운 천국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같이 있으면서도 심기가 불편하고 비판과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의사란 환자에게 절대적인 존재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고 심각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에 대해서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심각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가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가장 큰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심각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 지구상에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의 초청을 받아 마태의 집에 가신 날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금식하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셨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1:19-20지금 예수님이 금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을 할 때가 있고 안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신앙이란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내가 영적인 신랑인데, 나와 함께 대축제를 베풀고 있는 이 때에 금식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가 옵니다. 그때가 금식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신랑이 신부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는데, 신부가 늘 시무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면 신랑이 좋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최고의 태도는 그저 그저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하고, 음식을 먹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슬픈 기색을 하지 말라.”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께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셋방살이를 하거나 아파트에 살거나 옷을 잘 입었거나 못 입었거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느냐 자가용을 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기적에 지금 완전히 감격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워지면 세상 일에 대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멀면 세상 일이 중요해 집니다. 그 중에 돈이 제일 중요해 집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롯입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 목자와 내 목자가 싸우게 하지 말라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랴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하였습니다.
사람은 명분은 쉽게 양보하지만 실리는 양보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실리를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재산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실패하고 난 뒤,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 속에 살아 움직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시면 세상 일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약해지면 세상의 많은 사건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절망감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먹고 마시고 축제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금식일이니까 하며 엄숙하게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억지로 슬픈 기색을 띠고 경건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다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회개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2:20신랑 되신 예수를 빼앗기면 금식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다가 죄를 짓게 되면 회개하고 다시 금식해야 합니다.
신랑을 빼앗긴 신부가 음식을 먹으며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을 빼앗긴 아픔 같은 것이 오면 우리도 금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내 집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기쁜 생활을 하지만 내 집에 망하게 되었으면 어찌 음식을 먹겠습니까? 그 때는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 내 자녀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때에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 같은 아픔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기도 할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외식하지 말아야 됩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16-18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보에 싣고 금식하는 사람도 있고, 신문에 내고 금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별로 득이 없습니다. 받을 상도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받을 상이 없습니다.
금식기도는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 사람이 금식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야 합니다. 금식하는 날은 얼굴에 화장도 더 예쁘게 하고 머리도 잘 손질해서 아주 생기차게 나가야 합니다.
일부러 사람한테 힘없는 표, 금식하는 표를 내면 예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겨워 하십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지도자가 모 기도원 바위굴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친구 목사님이 가셔서 “아이구, 그 어려운 금식기도를 40일이나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네에게 축하드리네. 이제 내려가세.”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야, 예수님이 40일 하셨으니까 나는 하루만 더 하고 내려가려네.” 예수님보다 하루 더 하고 내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려가세. 예수님도 40일 하셨는데, 40일 했으면 됐지.” “아니야, 나는 예수님 보다 하루 더 할 걸세.”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금식기도를 드려도 39일 하는 것이 더 좋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리 내려가자고 해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목사님이 내일 다시 오겠다며 내려와서 다음날 가보니 죽어 있더랍니다. 예수님보다 하루 더 금식하고 싶어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이 만일 살아서 내려왔으면 “나는 예수님 보다 하루 더 41일 금식했다.”며 자랑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데려가셨는지도 모릅니다.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는 얼마나 아름다운 금식을 했습니까? 그는 금식할 때 큰 호수가에 있는 무인도에 들어갔습니다. 제자 한 사람만 데리고 가서 노를 젓게 했는데, 배에서 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내가 금식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오늘이 수요일이니 40일이 지난 목요일에 나를 데리러 오너라.”
그리고 빵 두 개를 일부러 제자에게 보여 주며 가지고 내렸습니다. 40일이 지난 목요일에 그 제자가 비밀리에 선생님을 모시러 갔는데, 그때까지 프랜시스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옆에, 빵 한 개는 바짝 말라서 그대로 있었고, 한 개는 반은 먹고 반은 남아 있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드리셨는데, 자기도 건방지게 40일 금식했다고 교만해질까 봐 일부러 빵 한 개는 먹은 것입니다. 그런 금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2022년 10월 11일 오전 6: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