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예배

"오늘의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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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Confession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막2:18-19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서 다윗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승리합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2:18

율법에 의하면 전 국민의 죄를 속함 받는 대 속죄일인 7월 10일에는 모든 백성이 금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2022년 금년에는 지난 주 수요일 10월 5일이 대 속죄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대제사장이 염소 두 마리를 준비했다가 제비를 뽑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제비를 뽑아 여호와를 위해 뽑힌 염소는 잡아서 하나님 앞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염소는 대제사장이 그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합니다.

안수하기 전에는 가축이고, 안수한 이후에는 제물이 된다 라는 법칙을 잘 아시지요? 안수할 때 “하나님, 이 염소의 아픈 곳을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죄를 그 염소에게 다 전가하는 것입니다. 민족의 지은 모든 죄, 불충성한 죄, 거짓말한 죄, 간음한 죄, 도둑질한 죄, 부모님께 잘못한 죄, 하나님 앞에 잘못한 죄, 십일조 떼어 먹은 죄 등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합니다.

그러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그 염소를 몰고 아사셀 광야로 갑니다. 영문 밖으로 염소가 나갈 때 사람들은 “내 죄가 멀어진다. 내 죄가 지금 멀어진다.” 라고 말합니다. 염소가 보이지 않으면 “내 죄는 사함 받았다.”하며 기뻐합니다.

염소를 몰고 간 사람은 사람이 없는 무인지경, 사방팔방이 어디인지 모르는 광야에 염소를 버리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백성의 죄가 다 그 염소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상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 국민의 죄를 그 염소 한 마리에 전가했듯이,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염문 밖으로 걸어가셔서 갈보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날 속죄일은 하루를 금식하며 “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하며 괴롭게 지냅니다. 그런데 나중에 유대인들이 이런저런 금식을 자꾸 만들어 금식을 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하며 행한 것이 일주일에 이 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했습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고난 주간이나, 년초에는 금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금식이 상당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금식은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금식은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먹지 않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해 뜨고부터 해 지기까지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하는 날은 새벽에 많이 먹어 놓고 점심만 거르면 되는 것입니다. 오후 6시는 저녁 때가 아닙니까? 그때는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루 한 끼식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금식은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배고픈 사람처럼 힘없이 다녔습니다. “아, 저 사람은 금식하는구나.”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레위의 집에서 잔치를 벌여서 귀한 음식을 먹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잘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말은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먹는 것을 즐깁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막2:19

여러분, 나와 다르다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자기와 같은 방식이 아니면, 자기와 다르면 틀리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비판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심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나와 같은 스타일로 믿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내가 금식하니까 당신도 금식해야 한다고, 내가 철야하니까 다른 사람도 철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여러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에 우리의 체질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획일적인 것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특징은 다양성 속에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한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처럼 믿지 않는 다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편견 중에 가장 큰 편견은 신앙의 편견입니다. 예수님은 외형보다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이에 있는 긍휼, 사랑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랑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결혼 초기엔 문제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보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엔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27:14

신앙은 시간의 이해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시간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시간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오실 때를 압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을 때를 모릅니다. 심판의 때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면 때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와 금식하지 않을 때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때를 안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와 찬미할 때를 안 사람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4-26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신세한탄하고 원망, 불평했다면 감옥의 죄수에 불과하게 됩니다. 감옥이 수도원이 되고, 별장이 되고, 교회가 된 것은 기도하고 찬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금식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16-18

신앙의 본질을 표현해 주는 3가지 종류의 행위가 있습니다. 기도, 구제, 금식입니다. 도덕적 삶을 살고 난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삶이 필요한데. 신앙적인 삶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기도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구제 - 이웃과 나와의 신앙 관계

금식 - 나 자신과 나와의 관계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이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로 결정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 중언부언하지 말라.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구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나팔 불지 말라. 구제는 은밀하게 해라. 이것이 이웃을 향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금식 - 외식하는 자와 같이 슬픈 기색을 내거나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 금식하면 티가 난다. 그래도 티를 내지 말라. 이때 머리에 기름을 발라. 금식하는 것을 타인이 모르게 하라. 이것이 진짜 금식이다. 금식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3가지를 종합한 말씀이 마태복음6:1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6:1

신앙생활은 상 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4

상 받을 줄 받고 왔는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는 말씀을 들으면 낭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눈에 노출되고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예수님에게 보여야 합니다. 설교에 사람이 보이면 설교는 실패한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진다면 진짜일 것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하건, 구제를 하던, 금식을 하던 예수님만 보이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유명해지고, 내 의견이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나타나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은 신앙생활에서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나 잘못된 금식을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입니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요 동기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동기가 이기적이거나 순수하지 못하면 주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일 년 중에 제일 좋은 날이 바로 마을에 잔치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이야 결혼식이 그저 그렇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에 누가 시집가고 장가가면 신바람이 났습니다. 국수 먹고, 떡 먹고, 온 동네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잔치를 일주일 동안 계속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속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노는데, 그 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집 잔치에 들어가면 금식이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 신부의 기쁨을 줄이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잔치 집에 들어가서 금식하고 있으면 청승맞습니다. 잔치 집에서는 허리띠 풀어놓고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큰 잔치를 하러 오신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으려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랑 신부가 있는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손님들이 금식하겠느냐? 금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울며 금식할 것이지만, 나와 함께 있는 지금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슬픈 기색 띠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감격, 감사, 찬양, 기쁨이 있는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그때 오늘을 금식이 있는 날이니까 금식해야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기쁨이 충만한 법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4:7

신앙생활은 억지로 슬퍼하고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2022년 10월 9일 오전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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